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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신간 안내] 거장 로맹가리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원고 복원판 재출간
● 그로칼랭
로맹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1만 3000원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한 철학자의 말은 그 말이 발화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유효하다.

독자들은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작가의 이름에 기대어 책을 선택하고 읽어낸다. 동일한 내용의 난해한 작품이 무명작가의 그것이라면 문학판을 모르는 신인의 '치기'로 보지만, 거장의 그것이라면 평단과 독자의 형편없는 안목을 탓한다.

로맹가리의 소설 <그로칼랭>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거장의 반열에 오른 예순 살에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처음 이 소설을 접한 출판사 편집자들은 출간을 결정한 후 결말부분을 수정하자고 제의했다.

작가는 그 의견을 따랐고, 결말이 수정된 원고가 출간됐다. 이후 그의 또 다른 걸작 <자기 앞의 생>을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작품은 작가의 이름값을 떠나 평가받게 됐지만, 작가는 이제 이중의 생을 살아간다. 그는 권총 자살로 삶을 마무리했고 이 모든 사실을 기록한 책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통해 로맹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한 인물임을 폭로한다.

그는 <그로칼랭> 결말 부분 삭제에 아쉬움을 표하며 나중에라도 출판되기를 희망했고, 그의 사후 33년 만인 2007년 원고 복원판이 프랑스에서 재출간됐다. 신간 <그로칼랭>은 그 번역본이다.

여기 한 고독한 남자가 있다. 서른 일곱의 독신남, 미셸 쿠쟁이다. 그는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남다른 사고방식과 언행으로 사람들의 웃음을 산다. 그의 회사 동료인 드레퓌스를 짝사랑해 그녀와 곧 결혼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말 한번 못 붙인다. 외로움에 시달리던 그는 우연히 2m 20cm짜리 비단뱀을 데려와 집에서 키우게 된다.

우울할 때 긴 몸으로 자신을 칭칭 감아주는 그 비단뱀에게 쿠쟁은 '그로칼랭(열렬한 포옹)'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로칼랭과 함께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다. 살아있는 동물만을 먹는 그로칼랭에게 음식을 주는 것, 주위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받는 것,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는 것 등은 그로칼랭과 함께 살기 위해 그가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다 할 관계맺기가 없는 생활에서 쿠쟁은 점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다. 그는 비단뱀 그로칼랭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 혼란을 겪는다.

사람들은 왜, 출간 당시 로맹가리가 아자르와 한 인물임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이는 그 파격적인 구성만큼이나 독특한 작품의 문체에서 비롯된다. 쿠쟁의 혼란을 드러내는 독특한 언어는 프랑스의 언어 체계에서 오는 유희적인 말들이 많다. 이 언어는 부정확한 이중의 의미를 파생시켜 인물의 독특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화법 역시 두서 없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그게 좋다. 누가 가엾은 생쥐(수리-souris)…… 아니, 자기(셰리-cheri)라고 불러 주는 것이 좋다' (59-60페이지)

로맹가리가 미지의 작가를 내세움으로써 가장 이득을 본 것은 이 말하기 방식일 것이다. 거장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면 거장의 능청스러운 솜씨에 빛이 바랬을 테지만 아자르는 이 새로운 언어를 통해 문단에서 이미 진부해진 작가 로맹가리를 구원했다. 무엇을 말하기에 앞서 누가 말하느냐는 중요한 것이고 위대한 작가가 직관한 것은 이 간명한 진리이다.

● 거장들의 녹음현장
이사카 히로시 지음/ 최연희 옮김/ 글항아리 펴냄/ 1만 6000원


일본인 프로듀서가 쓴 클래식 녹음현장 이야기. 저자는 그동안 베를린과 빈을 거점으로 활동한 음반 프로듀서로 베를린 필의 가를 라이스터(클라리넷), 외르크 바우만(첼로), 클라우스 슈톨(콘트라베이스) 등의 아티스트와 여러 명반을 만들어 왔다. 저자는 책에서 40년간 음반 제작현장 경험담을 들려주며 이들의 레코딩 철학을 그려낸다.

● 메트로폴리탄 게릴라-박홍규의 루이스 멈퍼드 읽기
박홍규 지음/ 텍스트 펴냄/ 1만 4000원


루이스 멈퍼드의 생애는 20세기와 겹친다. 도시학자, 문예비평가, 역사학자였던 그는 현대인에게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했다. 이 책은 루이스 멈퍼드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다방면에 걸친 멈퍼드 저작의 일관성을 아나키즘으로 규정한다. 역사, 문학, 사상, 예술, 건축, 도시학 등 다방면에 걸친 멈퍼드의 방대한 저작을 연대기 순으로 소개하며 시대적 배경과 후대 연구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수록했다.

● 메이드 인 베트남
카롤린 필립스 지음/ 정지현 옮김/ 검둥소 펴냄/ 9500원


<커피우유와 소보로빵>, <황허에 떨어진 꽃잎> 등 작품에서 해외 입양, 노숙자, 장애인,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다룬 작가 카롤린 필립스가 베트남을 배경으로 아동 노동현실을 소설로 형상화 했다. 14살 소녀 란은 건강을 잃은 아버지, 고엽제 후유증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촌을 돌보기 위해 미국과 유럽에 운동화를 수출하는 공장에 취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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