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띠

해가 길다. 식물 보러 들판에 나가 종일 돌아다니면 제법 많은 식물들을 볼 수 있다. 깊은 산속에서는 갑작스레 어둠이 찾아들고, 자주 다니던 산이라 해도 어둠에 와락 겁을 먹기도 하지만, 들판은 오래도록 머무는 여름 해가 있어 좋다.

야트막한 둔덕너머로 바람 따라 이고지는 풀들을 배경으로 지는 여름 해는 참으로 멋지다. 특히 요즈음엔 띠가 무리를 지어 피고 있어 장관이다.

이미 꽃이 피고 익어 하얀 솜털이 부풀어 오른 띠. 한참을 그 무리 속에서 바라보며 그렇게 초여름의 하루를 보냈다. 한낮에 익은 살갗은 아직 따끈했지만 서늘하게 물들어가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편안했다.

띠는 벼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름도 모양도 독특하다. 키는 무릎높이쯤 자라고, 산 깊은 곳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한적한 시골마을의 길 가장자리나 산길로 이어지는 언덕의 초원에서 자란다. 때론 강가나 바닷가와 이어지는 습지의 초원에서도 보인다.

잎이 거칠거칠하며 포기가 좀 억세다는 느낌 말고는 꽃이 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줄기 끝이 하나 혹은 둘로 갈라지고 그 끝에 손가락, 크게는 그 두 배 길이 정도의 꽃차례가 달리는데 밑부분에 은백색의 털이 많다. 그래서 처음에 고운 은백의 털이 결을 따라 반짝이는 듯 느껴지고 씨앗을 날릴 때면 한껏 부풀어 전체가 희게 보인다. 꽃잎이 필 즈음에는 은갈색 털 사이사이로 삐져나와 보이는 갈색의 수술과 이보다 진한 암술머리를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삐비', '삘기'로 더 알려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분들은 띠의 흰 꽃이 올라오면 이를 뽑아 먹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조금씩 단 맛이 돌고, 씹으면 씹을수록 마치 껌을 씹듯 쫀득해져 먹을 것도, 별다른 장난감도 없이 마냥 들판을 쏘다니던 아이들에게는 좋은 먹거리며 재미거리였다. 어린 띠의 줄기를 뽑아 누가 더 긴 것을 뽑나, 혹은 한 번에 누가 더 질긴 띠의 줄기를 많이 뽑나 같은 내기가 있었다.

땅속 줄기도 단맛이 나서 연한 것은 먹기도 하지만 주로 한방에서 모근(茅根) 또는 백모근(白茅根)이라고 하여 쓴 기록이 있다. 땅속의 뿌리줄기는 백색으로 가늘고 긴데 피를 깨끗이 하고, 열을 내리며 이뇨 및 지혈 효과도 있어 열병에 의한 갈증, 폐열에 의한 천식,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등 여러 증상에 처방한다고 한다. 꽃은 코피를 막는 데 쓰기도 한다. 질긴 줄기가 있어 도롱이를 만들거나 지붕을 얹는 데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이 변하여 이젠 그 친근하던 띠도 변하였다. 바닷가의 한 식물원에 있는 띠의 군락이 언론에 소개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지천이던 띠는 조금은 한적하고 깨끗한 곳으로 나가야 그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달짝하여 씹던 삘기는 너무 단 것이 많아 걱정인 요즘엔 손길이 가지 않지만 이젠 그 무리를 보는 일 만으로도 추억을 떠올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풀이 되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