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고] <반 고흐, 영혼의 편지>삶의 여백이 궁금할 때마다 테오가 되어 그의 편지 읽어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엮어지는 그림들은 생각보다 오래 생각을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했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빛의 산란이 내 시선을 붙잡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겨우 그 속의 한 무늬가 아주 조금씩 우리들 삶의 무늬로 직조되는 한 현상을 목도할 수가 있었다.
나는 지난 시간 속에서 고흐 자신이 먼 훗날에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는 일을 과연 허락했을까 싶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통해서 그야말로 절실히 어두운 풍경의 깊이를 헤아렸다.
왜 그토록 꺼질 듯 말 듯 이 책의 문장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기묘한 책장이 펼쳐져 있는 시간에는 적어도 머리보다는 손과 발이 더 가치있는 여백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고흐는 이 책에서 말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아무것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 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내가 지금껏 어떤 이유로 동경했던 창 밖의 것들은 기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연이 아닌 주연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겁 없이 창 밖의 많은 풍경을 동경해 왔다. 그리고 그 풍경에 관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도 일방적이었을 때 나는 너무도 그 환경이 뜨끔하였다.
일찍이 순조롭지 않은 나날을 예고하며 살았던 한 예술가는 권총으로 자신의 이성을 겨누는 순간까지도 주연으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품었다. 그 결기는 캔버스를 뛰쳐나온 글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이 책은 그의 붉은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펜 끝에 적신 기록이며 그의 붉은 심장박동 소리를 부르르 떨면서 껴안은 문장들이다. 나는 가끔 지금 삶의 여백이 궁금할 때마다 테오가 되어 그의 편지를 뜯어본다.
이기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