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백남준>아내이자 예술적 동료 구보타 시게코 은밀한 이야기 담아

국내에서 백남준만큼 끊임없이 이슈가 재생산되는 예술가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의 전기가 측근에 의해 제대로 정리된 적도 없었다.

2006년 비디오 아티스트의 거장으로 타계한 백남준의 반평생을 써내려간 <나의 사랑, 백남준>은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관련 서적 중 가장 은밀하면서 동시에 입체적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휠체어 신세를 졌던 백남준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여인, 백남준의 연인으로, 아내로, 예술적 동료로 40여 년을 함께했던 구보타 시게코가 입을 연 탓이다.

이 책은 백남준과의 관계 속에서 구보타의 여자로서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더불어 그들의 사상을 관통했던 플럭서스(Fluxus) 운동에 얽힌 수많은 예술가들과 에피소드까지 건져낸다. 독일에서 태동한, '흐름'이라는 뜻의 이 운동은 의외성을 기초로 한 反자본주의적 성향의 예술적 행동주의로 정의된다.

한국 최초의 '재벌'로 불렸던 백낙승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유복했던 어린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 심취했던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통해 기존의 예술을 철저히 전복하는 백남준의 예술적 사상의 기틀을 다진 이야기, 존 케이지의 음악을 접하고 '마치 모래를 씹는 것 같다'는 말로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표하며 존 케이지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일화는 잘 알려진 축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면이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형들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산이 탕진해 가난과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시간, 특히 재료에만도 큰 비용이 소요되는 비디오 아트를 했던 탓에 늘 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삶, 궁핍한 시절 받은 1만 달러의 아버지 유산으로 훗날 그의 비디오 걸작 중 하나가 된 에 등장하는 '일그러진 불상'을 구입했던 일,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해온 그가 왼쪽 팔다리가 마비된 채, 구겐하임 프로젝트인 <야곱의 사다리>를 힘겹게 완성해낸 일화는 백남준이란 거장 이면의 고뇌와 고통이다.

오로지 구보타이기에 들려줄 수 있는 일화들도 있다. 1965년, 오노 요코조차 '게이샤나 할 짓'이라며 거부감을 표했고 전위예술계 역시 경악게 했던 <버자이너 페인팅>. 예술가로서의 구보타 시게코가 자신의 사타구니에 붓을 꽂고 쭈그리고 앉아 흰 종이 위에 붉은 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액션 페인팅이었다. 그 퍼포먼스의 진짜 기획자가 백남준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였던 조지 마키우나스를 통해 뉴욕의 버려진 공장지대가 세계에서 가장 전위적이고 예술적인 소호지역으로 재탄생한 에피소드, 10년간 연인으로 지냈지만 결혼은 거부했던 백남준이 돌연 구보타에게 청혼한 사연, 친아들처럼 여겼던 백남준의 간호사 스티븐이 9·11 , .

무엇보다 당시 예술계의 분위기, 백남준의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고민, 자라온 환경과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섬세한 필치로 펼쳐져 그동안의 전문서보다 쉽게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