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작가] 소설가 박완서 등단 40주년 맞아 새 산문집 출간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 펴냄/ 1만 2000원

거대한 사유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여느 오락프로그램 못지않은 재미를 주는 '킬링타임'용 책도 있다. 전자는 두고두고 남에게 추천하면서도 두 번 읽지 않을 책이고, 후자는 시간이 지나면 서재에 꽂기도 민망한 것이 태반이다.

사실 두고 읽고 또 읽는 책은 별 것 아닌 이야기 속에 '내 마음 아는 이' 같은 저자가 쓴 소박한 것이 많다. 그런 소박함 속에 세대를 뛰어넘은 보편성을 지니면 불후의 명작이 될 터,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도 팔순 작가의 이야기보따리를 기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새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출간했다. 2007년 초 펴낸 <호미> 이후 쓴 글을 묶은 이 산문집에는 세상에 대한 노 작가의 따뜻한 관심과 애정, 지난 세월이 남긴 상처와 이 시대에 전하는 따끔한 비판이 담겨 있다.

'금년은 또 경인년이다. 나에게는 그냥 경인년이 아니라, 또 경인년이고 또 경인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6.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老軀)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20페이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이 책은 팔순의 노 작가가 등단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낸 책이다. 책의 첫 머리에서, 작가는 소설의 원형이 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하고, 순탄한 생활을 하면서도 전쟁의 고통과 죄의식을 외침으로써 위로받고 치유 받고 있었노라고. 그래서 늦은 나이에 소설을 썼고 순탄한 작가생활을 했노라고.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25페이지)

작가의 글이 세대를 뛰어 넘어 공감을 얻는 것은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일상의 사색을 담은 에세이, 2부는 2008년 한 해 동안 신문에 연재한 서평, 3부는 추모의 글이다.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등 여러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을 적은 글과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박경리, 박수근 화백 등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추모글이다.

'영원한 현역'이란 별명답게 작가는 "기력이 있을 때까지 계속 글을 쓸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156페이지)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