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슬라보예 지젝독일 관념론, 마르크스주의, 라캉 정신분석학 기반 독특한 사유체제 제시

일본의 한 저명한 저널리스트는 짧은 기간, 한 분야에 '해박한'지식을 쌓아야 할 때 논문을 찾아 읽는다고 했다. 따분한 방법으로 들리지만, 꽤 유용하다.

과학부터 철학까지, 논문은 그 분야 지적(知的) 여정의 역사를 모두 집약해 소개한 후 제 할 말을 시작한다. 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해당 분야 거대담론의 구심점을 알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한 분야에 정통하고자 한다면, 그 분야 책을 한 권 골라 읽으면서 각주를 따라가 원전을 찾고 다시 읽기를 몇 번 반복하면 된다. 인문학 분야에서 최근 가장 많이 각주에 인용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는 그는 이미 지식계의 스타다. 자신의 이름으로 50여 권의 책을 출간한 그는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학자이면서 동시에 'MTV'철학자란 비아냥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가 이렇게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현대인문학의 발판인 독일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독특한 사유체계를 제시한다. 이런 사유에는 그의 태생적 환경이 한 몫 한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72년 철학박사 학위를, 이후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사상의 원천은 이 두 분야다. 1990년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슬로베니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 이 이력은 그의 모순적 삶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급진좌익에 가까운 지식인이 자본주의화를 지지하는 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것. 이런 모순은 그의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한 국가주의 철학자 헤겔과는 정반대 편에 있다. 지젝의 헤겔은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그렸던 '부정과 거부와 분열'의 헤겔이다. 이 부정의 정신으로 지젝이 행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는 어떤 이론과 체계든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 그것을 부정하고 깨부수는 비판의 도구로 헤겔의 변증법을 이용한다.

지젝이 기대고 있는 라캉도 이 코제브적 헤겔로 해석된 라캉이다. 자기동일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주체다. 그 주체가 바로 라캉이 말하는 주체라는 것. 지젝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사유의 토대로 삼고 있는데, 그때의 마르크스도 헤겔과 라캉이 융합된 마르크스다. 국내 지젝 연구자인 민승기 경희대 교수는 지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라캉과 헤겔을 함께 읽고자 하는 지젝의 우주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탈구)되어 있다. 라캉을 따라가다 보면 헤겔이 나오고 헤겔을 따라가다 보면 라캉과 만나는 기이한 경험. 라캉과 헤겔 '사이'. 라캉이자 헤겔인 동시에 라캉도 헤겔도 아닌 '라캉-헤겔'이라는 괴물.'

둘째, 그럼에도 그의 글은 대중성을 가진다. 지젝은 철학적 주제를 SF소설,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통해 변주해 낸다. 이를 통해 그는 철학적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가 일 년에 한두 권씩 정기적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이제 그의 '마니아'들도 그의 책을 모두 읽어내기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말한다. 입문자들에게 이안 파커의 <지젝>, 김현강의 <슬라보예 지젝〉등 다이제스트 판을 먼저 추천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