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르 이저자]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방대한 지식,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과거ㆍ현재ㆍ미래 방향 제시

평론가 겸 소설가, 수필가, 교수, 초대 문화부장관…. 이어령 전 장관 앞에 붙은 이 수식어들은 20세기 한국의 문화예술 담론이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끝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963년 펴낸 <흙속에 저 바람 속에>부터 <축소 지향 일본인>(1981), <디지로그>(2006) 등 그가 쓴 일련의 책은 또한 근대 한국의 과거와 현실,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방대한 지식, 유려한 문장, 깊이 있는 통찰력과 창조적 발상은 그의 글의 특징이다.

이어령.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마쳤다. 1955년 서울대학교 교내지 <문리대학보>에 '이상론(李箱論)'을 발표했고, 이듬해 <문학예술>에 '현대시의 환위와 한계', '비유법논고(攷)'가 추천돼 등단했다.

그를 소개하는 말에는 수십 가지가 있을 테지만, 이 활동의 토양은 '문학'일 게다. 그의 첫 평론인 <이상론>을 비롯해 1956년 한국일보에 발표한〈우상의 파괴>, <작가의 현실참여> 등 일련의 평론은 근대 한국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를 집약하고 있다.

등단 뒤 그는〈화전민 지역〉, 〈신화 없는 민족〉, 〈카타르시스 문학론〉, 〈해학(諧謔)의 미적 범주〉등 글을 통해 한국문학의 불모지 상황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아야 할 것을 주장했고, 이데올로기와 독재체제의 금제(禁制)에 맞서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전후세대의 이론적 기수로 등장했다.

그를 일반에 알린 건 아마 당대 문인들과의 치열한 논쟁일 터다. 정력적으로 평론을 썼던 이 시기, 그는 김동리와 '작품의 실존성'에 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조연현과도 '전통논쟁'을 벌였다.

당대의 비평가 김춘수, 고석규, 이철범 등과 함께 현대평론가협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출판사 '문학사상'과 '이상문학상'을 주도적으로 만든 것도 이어령 전 장관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집>은 당대 한국 문단 소설의 '바로미터'로 꼽히며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다.

문학상 수상작과 최종후보작을 모아 책을 펴내는 국내 문학출판사들의 관행은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그 시발점으로 친다.

탁월한 평론가였던 그는〈장군의 수염〉, 〈무익조〉, 〈암살자〉, 〈전쟁 데카메론〉, 〈환각의 다리〉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고, 일흔을 넘어 첫 시집 <어느 무신론가의 기도>를 내기도 했다.

한 국가의 문화부 장관이 문학평론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다시 브라운관의 배우로 바뀌는 풍경은 활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표상 같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이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디지로그'란 개념으로 2000년대 독자를 만나고, 창조적 상상력 등 21세기 새로운 감각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활자시대 최고의 석학, 이어령 전 장관은 영상세대에게 '이승무 감독 아버지'로 대중에게 각인될지도 모르겠다. 올 하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영화계 이목을 집중시킨 <워리어스 웨이(The Warrior's Way)>의 감독 이승무씨는 이어령 장관의 아들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듀서 베리 오스본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첫 작품을 '글로벌 프로젝트'로 만들었다.

"우리 집안은 식구들이 다 모일 때 학문적으로 확연히 나이 차가 나요.(…)한 마디로 '프린팅 미디어'에 익숙한 세대와 '사이버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세대가 각자의 방식대로 예술을 표현해 온 셈입니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어령 전 장관이 남긴 말이다. 프린팅 미디어에서 사이버 미디어로. 그의 작품과 생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집약하고 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