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노루발

안개가 그윽했다. 그윽하다는 표현이 어색한 듯도 하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출근길, 오솔길이라는 피아노곡을 들으며 차분하게 내려 깔리는 안개가 숲을 감싸 안듯 그렇게 퍼져 가는 모습을 본다.

한 해의 끝, 경황없던 마음에 작은 여백이 생겨나고 그 여백은 마음을 바꾸고, 마음이 바뀌고 나니 힘겹기만 했던 일상에 생명을 불어 넣듯 활기가 생겼다. 무채색의 안개가 만들어준 기적과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기적은 마음만을 바꾼 것 같지 않다. 숲의 모습도 바뀌었다. 메마르게 퇴색되어 가던 숲에 안개가 퍼지니 남은 초록은 더욱 진해지고 만지면 부서질 듯 말라있던 잎새들이 선명하게 어우러진다. 얼마나 멋진지 모르겠다. 그 모습은 여전히 그 숲은 살아서 견디고 새 계절을 기다리고 있음을 믿게 해준다.

이런 초겨울의 숲에서는 작은 풀 한 포기가 마치 점처럼 자라지만 생명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즈음 숲에서 만난 도 그러하다.

노루발은 노루발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며 중부지방에서 흔치 않은 상록의 풀이다. 지금은 콩팥 모양의 동글동글한 잎 여러 장이 한 포기를 만들며 이 산 저 산 어딘가에서 푸르게 살아 있다.

노루발풀
더러는 꽃이 달렸던 꽃대 그대로 열매가 익고 씨앗마저 터트려 내보내고 남은 갈색의 대와 열매의 껍질이 지난 계절의 흔적처럼 남아 있기도 하다. 잎은 잎맥이 발달한 부분의 색깔이 연하여 마치 무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꽃은 한 여름에 핀다. 한 뼘쯤 꽃대가 올라오고 10개 남짓한 백색의 꽃들이 차례로 달린다. 암술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래서 노루발의 전체적인 모습을 귀엽고 친근감 넘치게 만들어 준다.

보통 한번 만나면 근처에 몇 포기씩을 함께 보게 되는데 땅속에서 가는 땅속 줄기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쓰임새로 치면 상록의 예쁜 잎이 있으니 관상용으로 가능할 듯한데, 다소 그늘진 정원 또는 분에 담아 키우는 게 적절할 듯하다. 약용식물로는 유명한 풀이다. 이 풀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부인이 사냥꾼을 피해 도망쳐온 노루를 치마폭에 숨겨 주었는데, 이후 그 부인이 아파 사경을 헤맬 때 노루 한 마리가 풀을 입에 물고와 놓고 갔고 부인은 그 풀을 먹고 살아났다고 한다. 이란 이름은 노루가 가져다 놓고 가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가녀린 꽃대가 노루의 발과 같다 하여 부른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한방에서는 이 풀을 녹수초(鹿壽草)라 하며 약용한다. 생약 이름에도 노루가 목숨을 살린 사연이 담겨 있다. 매우 다양한 증상에 처방하지만 특히 몸이 허한 부인들 기운을 얻게 해주고 여성의 생리적 기능을 좋게 해준다고 한다. 신장에 아주 좋다고 하고 류마티스성 관절염에도 효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채색의 겨울산에 생명력을 주는 것은 안개이기도, 이기도, 그 잎의 초록이기도 하다. 그 숲에 가득한 그 무엇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담아내는가가 남은 한 해를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 같다.

노루발의 꽃말이 '소녀의 기도'라고 한다. 고개 숙인 꽃송이들의 모습과 순결한 흰빛이 그리 느껴지기도 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한 달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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