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존 치버장편 출간… 화려한 미국적 생활 뒤 어두운 면 포착

'장편소설 대세론'.

몇 해 전 문학계 화두였던 이 말은 국내 문학계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영화, 드라마 등 원소스멀티유스의 시발점으로 생각되지만, 이는 장편소설에서 가능한 말이다.

'본격문학'이라 불리는 이른바 순수문학계의 경우 등단부터 문학상심사 등 거의 모든 제도가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꽤 많은 문학상을 받고 인지도도 높은 작가가 등단 10년 만에 첫 장편을 발표하는 풍경도 어색하지 않은 게 국내 문학계 현실이다. 그러니 장편 대세론은 원소스멀티유스 시대를 맞아. 이제라도 작가들에게 장편소설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한 출판시장의 구호인 셈이다.

서두가 길었다. 이번 주 소개할 미국 작가 존 치버는 평생 15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발표한 단편의 대가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로 더 친숙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그의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이다. '교외의 체 호프'라 불렸던 그는 주로 뉴욕 교외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인간의 타락과 분노, 허물어져 가는 삶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 요컨대 스타일이나 업적이나 사후 평가에서 국내 작가들의 롤모델인 셈.

'외국 단편'하면 일련의 계보가 그려진다. 미국 단편으로 좁힌다면 너대니얼 호손-오 헨리-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정도 되겠다. 레이먼드 카버의 술 친구였던 존 치버는 카버와 함께 미국 소설의 중흥기를 열었지만, 작품 스타일에서 거의 대척점에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카버의 빛나는 단편들이 정신적 고양의 순간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면, 치버의 작품은 정서적 추락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는 단편이었다.

별명처럼, 그가 주로 관심을 가졌던 건 교외의 일상이다. 뉴욕 교외의 중산층이 주인공이 되고, 순탄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삐걱거리는 과정을 무심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작품의 주된 시대적 배경은 1950~60년대 미국이다. 2차대전 이후 경제적 번영으로 두텁게 형성된 중산층이 대도시 교외의 주택단지로 몰려가 드라이브와 영화관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를 만끽하던 시대다. 그의 소설은 구성, 문장, 캐릭터 등 소설 교본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단편이기에 국내 작가들의 독서목록 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다.

국내 번역, 출간된 <기괴한 라디오>는 어떤가. 주인공은 모든 면에서 평균적이고 평범한 부부다. 남편 짐은 아내 아이린에게 새 라디오를 하나 선물하는데, 이 '기괴한' 라디오는 아파트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여러 대화를 그대로 들려주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엿듣는 아이린처럼, 작가는 물질주의의 세례를 받지만 내면적으로 무력감과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중산층의 분열적 행태를 세밀하게 그린다.

그의 단편 속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은 감춘 채로 강박적 행동을 일삼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꽉 끼는 옷을 입고 파티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이 염세적 태도를 보이자 살의를 표출하는 형('참담한 작별') 같은 인물 말이다.

50년대 후반 장편작가로 변신한 그는 <왑샷 가문 연대기>, <왑샷 가문 몰락기> 등을 발표한다. 최근 번역, 출간된 <팔코너>는 그의 말년 작품. 작가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타인과 삶으로부터 종국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본성에 대해 통찰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한 세부적인 묘사, 시어처럼 조탁된 어휘, 치밀한 캐릭터로 작가는 화려한 미국적 생활의 가려진 어두운 면을 포착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