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왕버들

왕버들꽃
숲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나무나 풀들…. 그저 자연의 일부인 식물들은 이름을 알고 불러주어야 비로소 하나의 의미로 인식된다. 그래서 너무 이름에 집착해서 나무나 풀을 바라보는 시선이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름으로 구분해 주지 않아도 그냥 그 자리에서 존재 자체로 가슴에 자리하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마을 입구에 있던 정자나무(아마도 느티나무이겠지만)가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속리산 입구에서 스스로 가지를 올렸다는 정이품송, 백두대간 높은 곳에서 희뿌옇게 수목한계선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들은 사실 사스래나무이다)도 그렇다. 그리고 청송 주왕산 근처의 저수지인 주산지, 그 물 속에 몸의 일부를 담그고 있는 특별한 풍광의 나무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그냥 주산지의 나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남아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런데 식물분류학이라는 전공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나무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은 병이 도진다. 그 나무는 다름 아닌 왕버들이다. 봄이 아직 머뭇거려 겨울의 삭막함이 그대로 드러난 주왕산의 숲에 둘러싸인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저수지 속에 백 년이 넘은 왕버들이 있다.

이미 노쇠하여 가지가 갈라지고 스러지고 생명의 기운을 찾아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이제 봄은 이 주산지의 왕버들에게도 찾아들 것이다. 왕버들은 여리고 보드랍고 따사로운 연두와 노란빛이 어우러진 각별한 색깔의 잎과 꽃을 만들어내 우리들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이 지는 큰키나무이다. 버드나무, 능수버들, 갯버들과 같은 버드나무 집안의 다른 나무들과 비교하여 유난히 크게 자라고 오래 산다. 20m정도까지 큰다. 덕택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도 아주 여럿 있다.

주왕산 근처엔 주산지의 왕버들이 아니고도 청도군 각북면 물가에 살고 있는 오래된 천연기념물 왕버들도 있다. 물론 이 곳 말고도 김제, 성주, 청송 등 여러 곳에 있다.

왕버들은 다른 버드나무들처럼 줄기가 가늘어 늘어지지 않고, 잎은 긴 타원형이지만 가늘고 긴 능수버들 잎보다는 통통한 편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잎자루 아래 작은 잎처럼 둥글고 귀여운 턱잎이 발달하여 구분하기가 쉬운 편이다.

꽃은 4월에 잎과 같이 피어난다. 암나무와 숫나무가 따로 있으니 구분해서 볼 만한데(꽃이 필 때가 아니고는 구분할 수 없다) 곤충을 부르는 풍매화가 아니고 바람의 도움을 받는 풍매화여서 꽃잎 같은 화려한 식물기관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작은 꽃들이 모여 손가락 같은 꽃차례를 만드는데, 그 빛깔이 그냥 봄 그 자체를 말하는 듯한 그런 연두노랑빛이어서 자연이 얼마나 다채로운 존재인가를 절감하게 해준다.

봄이 절정일 즈음, 왕버들은 열매를 맺는다. 암나무의 암꽃들은 결실에 성공하면 열매를 부풀려 솜털을 가득 담은 씨앗들이 터져 나오고 바람을 타고 씨앗들을 날려 보낸다.

경산리 성밖숲 왕버들 (천기403 040526서민환)12
이 봄에 왕버들이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마치 생을 마감한 듯한 오래 묵은 가지들에서 생명의 아름다운 색깔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든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