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자크 데리다현대적 사상 조류의 원천… 대표작 재번역 출간

"여러분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 찾으려고 공부하는 분들은 이 수업 나가주세요."

대학 시절 한 교수는 수업 첫 시간에 이런 얘기로 수업에 진 빼는 걸 재미로 삼았다. 이후에도 종종 "고전이라는 책들은 제발 읽지 말라"며 학생들에게 딴죽을 걸곤 했다.

당연히 출석은 부르지 않았고, "그게 나의 원칙"이라며 첫 시간에 공표했으니 뒤집을 수도 없었고, 학생들은 수업에 빠지기 시작했다. 중간고사 이후 신청 정원의 절반도 채 수업에 나오지 않자 "교수 생활 20년 만에 이 수업 학생들만큼 공부 안하는 학생은 처음"이란 말로 돌연 태도를 바꿨다.

이 교수는 문화연구를 가르쳤는데, 데리다를 신봉해 일부러 백발로 염색하고 다닌다는 풍문이 돌곤 했다.(실제로 얼굴도 닮았었다) 데리다가 누굴까? 데리다가 누구이기에 고전이란 고전은 자기 혼자 다 보면서, 애들한테 읽지 말라고 하는 걸까? 대학 시절 데리다는 지적 허영심의 표상으로 각인됐다.

자크 데리다. 해체주의 창시자,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다. 1930년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철학사를 가르쳤다.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는데,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

대학시절 한번쯤 마르크스나 라캉의 책을 폼으로 도전해보듯, 데리다의 책 역시 지적 허영심 때문에 한 번씩 도전해 보지만 역시 마르크스와 라캉 저서가 그러하듯, 데리다 저서도 대부분 '완독 실패'로 끝난다. 데리다의 책은 20세기 어떤 책보다 난해한데, 불분명한 개념은 현학적 문장에 쌓여 더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20세기 지성계에 미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축에서 '현대판 소피스트'라 비아냥거리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도 머리 검은 동양 남자를 20년간 백발로 염색시킬 정도라면 그 생각, 꽤나 매력 있었던 게 아닐까?

그 매력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반골 기질 되겠다. 요컨대 이성주의 문화와 형이상학 계보에 딴죽 걸기. 흔히 서구를 이성주의 문화라고 한다.

불완전한 이 세계 배후에 완전하고 무한한 근원이 있고 이 배후세계의 진실과 지식은 이성과 언어(로고스)로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전통에 최초로 반기를 든 이가 니체이며 하이데거를 거쳐 프랑스에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데리다를 만나면서 니체 사상이 만개했다.

데리다는 말한다. 로고스는 세계와 무관한 독자적 체계이며, 그것은 완전한 세계라기보다 우연성에 기댄 세계이고, 따라서 텍스트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차이와 단절이 존재한다고. 이른바 해체론이다. 데리다 저술 작업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67년으로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 등 세 권이 한꺼번에 출간되면서다.

이 3부작을 통해 그는 구조주의의 현상과 본질의 이분법적 논리를 비판한다. 몇 달 전 국내 다시 번역, 출간된 그의 대표작 <그라마톨로지>를 살펴보자. 에크리튀르, 해체, 차연, 대리보충 같은 데리다의 독창적 개념어들이 동시다발로 첫 출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음성언어가 1차 언어, 문자 언어는 2차 언어(음성언어를 대리하고 보충하는 역할)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는다. 즉 음성언어 이전에 문자언어 곧 에크리튀르가 있었다는 것. 이번 출간본은 96년 국내 초역한 김성도 교수가 재번역하고, 옮긴이 주석과 해제를 달았다.

데리다는 다시 1972년 <철학의 여백>, <소종>, <입장들>을 출간하며 서양철학이 구축한 로고스 중심주의의 토대를 해체한다. 이후 2004년 췌장암으로 죽을 때까지 80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해체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탈역사주의 등 수많은 현대적 사상조류에 원천이 됐고, 문학, 건축, 영화 등 현대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지성계와 예술계에 아주 많은 영향과 발상을 준 사상임에 틀림없지만 그 자체 가진 모순은 역시 만만치 않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면 원래 제 의심의 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그것. 고로 반골적 의심하기는 제 근거로 돌아갈 토양을 굳게 할 때 제 소명을 다 한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다음 그 교수가 다시 흑발로 염색을 하고 수업한다는 말을 들었다. 혹자는 그가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혹자는 데리다의 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