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염승숙 두 번째 소설집 파산자 뜻하는 '노웨어맨' 등 8편 이야기 속 한층 성숙한 현실 감각

소설가 염승숙 씨가 두 번째 소설집 <노웨어맨>을 냈다. 발랄한 문체,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는 신작에서 한층 성숙한 현실감각을 선보인다. 요컨대 개인에서 사회로의 인식 확장이다.

물론 이 사회는 82년에 태어나 2000년대 중반 작가가 된 염승숙의 눈에 포착된 세계의 단면이고, 이제까지 작가가 읽고 듣고 생각해 만든 인식의 총체가 여과해 재구성한 현실일 것이다. 여덟 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묻는다. 풍요의 시대, 안락한 성장통을 겪은 80년대 생은 왜 이렇게 불만이 많은가? 그럼에도 왜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하는가?

어디에도 없는 사람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자라 2만 달러 시대에 진입한 오늘의 20~30대는 어떤 세대보다 뛰어난 '스펙'을 자랑한다. 자기계발과 PR 능력, 외국어 솜씨까지 자본재 생산 시스템에 맞춘 인간형으로 성장했다. 누구보다 소비자로서 권리를 의식하며 살아왔지만, 단군 이래 최대 취업난을 겪으며 경제인구로 편입되지 못한 뜬 세대가 됐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88올림픽에 설?던 아이가 자라 88만 원 세대가 되는 것이 결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만은 아니라는 것.' (<노웨어맨> 151페이지, 단편 '레인스틱')

"늘 경제지표나 실업률 같은 수치를 많이 듣고 자랐던 것 같아요. IMF이후 경제수치가 급락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걸 많이 봤고요. 격동기를 겪었다기보다는 늘 그런 지표나 불안을 바라보는 세대였죠."

이전 세대가 마르크스를 빌려 정치경제의 인과관계를 머리로 인식했다면, 유년기에 IMF를 겪은 이들은 이를 체감하며 자랐다.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배틀 로열 게임은 이들에게 현실로 육박한다. 때문에 지금의 청년세대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착실하게 현실에 순응하려 발버둥친다. 가령, 이들처럼.

인물 1: 장공수. 직업은 짝퉁 제품 디자이너. 아버지 장용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기업형 슈퍼마켓, SSM의 등장 후 파산신고를 하고 사라졌음. 때문에 파산자를 지칭하는 은어 '노웨어맨'이란 말을 들으면 분노함.

'모두가 가짜인데, 진짜를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인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노웨어맨이라니, 아무것도, 아니라니.' (68페이지, 단편 '노웨어맨')

인물 2: 이진성. 실업자. 한때 원조 제품을 모방한 미투(me too)제품 기획의 달인이었음. 파산신고 후 가짜 온천으로 떼돈을 번 고등학교 동창 순기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함.

'진실은 사장되고, 진짜는 침윤되고, 가짜만이 새로이 건설되는, 반(叛)의 세계다.' (114~115페이지, 단편 '무대적인 것- 노웨어맨2')

소설집에 실린 두 편의 연작은 작가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가짜와 진짜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에서 가짜를 만들며 살아가다 자기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장공수의 아버지 장용은 아들이 짝퉁을 만들며 번 돈으로 파산을 신청했고, 이진성 역시 본인이 출시한 미투 제품이 경쟁사 원조제품의 시장점유율을 압도하자 경쟁사 소송으로 실업자가 된다. 요컨대 이들은 아등바등 안착하려 하는 이 세계를 가짜로 인식해 버림으로써 저 너머의 진짜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품어 보려 한다.

'He's a real nowhereman'(그는 진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죠.)

이 작가가 비틀즈의 '노웨어맨(nowhereman)'을 빌려온 것 까닭은 이 때문일 게다. 존 레논의 불안한 심리를 담은 자전적 노래다.

발랄한 상상에 코팅된 현실

묵직한 현실감각이 우울한 기시감만을 선사하는 건 아니다. 이 작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코팅된다.

예컨대 가짜를 통해 진짜를 찾겠다는 포부를 '라이게이션'(거짓말Lie+네비게이션Navigation)기기 개발로 실천하는 윤 대리(단편 '라이게이션을 장착하라'), 하루 한 시간 가로등으로 변신해 팍팍한 일상을 견디려는 금련(단편 '바디펌 기기의 생활화'), 악기 레인스틱처럼 몸이 15도 가량 기울어지면서 빗소리를 내는 전염병에 걸리는 젊은이들(단편 '레인스틱')처럼. 첫 소설집이 환상적 요소를 전면적으로 등장시켰다면, 신간은 현실의 일부분을 형상화하거나 현실문제를 탈출하는 돌파구로 환상적 요소를 등장시키고 있다. 첫 소설집에 비해 배경은 한층 리얼하고 인물과 서사는 간명해졌다.

"첫 소설집 내고 '환상소설 작가'로 소개된 적이 있었어요. 저는 현실을 말하기 위해서 소설적 기법 중 하나로 우화나 풍자를 끌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독자에게는 이야기 방식만 보였던 거죠. 어휘나 메타포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는 평도 가끔 들었고요. 이야기 방식이나 밀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죠."

몇 년 전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첫 책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 소소한 인물을 던져 놓았다면, 이제는 나와 그들의 관계, 신분과 계급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2009년 4월 앙팡테리블 '환상의 세계 통해 현실을 말하다')

신간은 그 과정에서 쓴 이야기들이다. 이 관심이 지속된다면 인물은 더 현실에 발붙일 테고, 이야기는 더 견고해질 것이다.

대학원에서 근현대문학을 공부하는 작가는 요즘 장편을 집필 중이다. "작품 구성과 인물, 장면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구상이 끝난 후 소설을 쓴다"는 꼼꼼한 성격 탓에 지난해부터 줄곧 장편 탈고를 목표로 잡았지만 아직 요원하다. 공부와 창작을 병행하는 작가들은 본의 아니게 신작이 이전 세대 작가의 작품과 겹쳐 읽힐 때가 있다.

이 작가의 소설집도 첫 책은 이범선의 '오발탄'에, 신간의 단편 '레인스틱'은 손창섭의 '비오는 날'에 비견돼 평가됐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30년대 소설을 알면 40년대 소설이 재미있게 읽히고, 40년대 소설을 알면 50년대 소설을 재미있게 볼 수 있죠. 하지만 연구자의 시선과 작가의 시선은 다르니까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으려고 하죠."

하지만 이 착실한 모범생은 정통 서사의 기본을 알고 있고, 그 기본 틀 안에서 제 세대의 시선과 감각과 상상력을 얼버무려 이야기할 것이다. 환상적 상상력과 현실성을 두루 갖춘 우리말 입담꾼. 젊은 작가가 쏟아지는 한국 문단에서 그가 주목 받는 이유다.

"경제나 지표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있어요. 단편뿐 아니라 장편에서도 이런 생각이 드러날 수도 있겠죠. 장편은 제대로 된 우화나 풍자소설을 쓰고 싶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