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걸'GQ' 편집장]첫 소설집 , 기존 소설문법 탈피한 8개 이야기

장면 1.

평균대 위에 소녀가 서 있다. 체지방 0%, 훈련으로 단련된 말근육은 흰색 운동복에 쌓여 있고, 역시 체지방 0%의 밋밋한 가슴은 물고기 아가미처럼 팔딱거린다.

두 번 심호흡 후 연속 3회전 돌기. 뒤로돌아 착지. 정해진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며 만드는 아름다움. 만족한 표정의 소녀와 팔짱 끼며 견제하는 선수들. 잠깐의 정적 후 부침개 부치는 소리 같은 박수가 퍼지고 전광판에 번쩍! 불이 들어온다. "기술점수 9.2 표현점수 9.5 예술점수 9.7, 현재 1위. 역시 완벽합니다!"

이어 등장한 선수. 여유롭게 관객을 응시하고 평균대 위로 돌진, 7회 연속… 발가락 세우며 제자리 돌기를 선보인다. 어리둥절한 선수들. 환호하는 관객들. 클로즈업된 선수의 얼굴. "이번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현역 최고의 발레리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환호성 대단하죠? 팬들이 체육관도 장악했나 봐요. 그런데 저건… 처음 보는 기술인데요."

장면 2.

혹자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치는 2011년에도 국내 문학출판사들은 문예지를 펴낸다. 약속이나 한 듯 신작 단편과 신작시가 발표되고 장편이 연재되며 이전 분기에 출간된 몇몇 작품집이 리뷰와 비평형식으로 소개된다. 등단한 자와 등단을 준비하는 자들은 제각각 이번 분기 최고 작품이 무엇인지 가늠하려고 2월과 5월, 8월과 11월에 서점으로 달려간다.

혹자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2011년, 국내 순문학 시장은 이렇게 견고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남성패션잡지 의 편집장 이충걸 씨가 첫 소설집을 냈다. 기존 한국 소설의 문법과는 상관 없는 8편의 소설이 실렸고, 당연히 이 모호한 소설에 대한 비평가의 해설도 배제됐다.

왜 쓰느냐고 묻지마라

장면 1은 허구, 장면 2는 실제상황이지만, 이 둘은 묘하게 겹쳐진다. 순문학의 완성도는 언어의 기능성과 목적성, 구성의 견고함과 인물 사이 갈등선 기타 등등의 요소로 측정되고 평가되며 작가의 기량은 분기별 발표 작품마다 계산되고 합산된다. 그러니 이런 양식에 익숙지 않은 그의 작품이 평단에서 논의될 일은 아마, 없을 테다.

하지만 글에 대한 내공과 시대에 대한 직관은 그의 이력이 말해주고 있고(주지한 것처럼 그는 남성잡지가 국내 발붙이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를 만들었고,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이 잡지를 10년 동안 만들고 있다), 이 이력이 켜켜이 쌓여가며 함께 쌓인 그의 골수팬도 상당한 바, 그의 소설은 또한 그의 소설이란 이유만으로도 시장에서 읽힐 테다.

"문학에 대한 신념보다는 글쓰기의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갖고 싶었어요. 소설은 글쓰기의 한 실험일 뿐이고 그래서 순결한 마음으로 소설 쓰는 문학청년과 작가들께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스타트는 사실 그거에요."

인터뷰를 수락하며 그가 말했다. 그리고 단편 '완전히 불완전한'을 표제작으로 정한 이유가 "제목이 주는 임팩트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글쓰기 자체라는("저는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 있는 작은 왕국의 왕이라는 생각을 해요.") 다분히 '문학적인' 견해. 그러니 그의 소설에서 인물, 사건, 배경이 하나의 풍경을 향해 달려가는 기승전결의 구성을 기대해선 안 될 일이다. 그의 직함에 비춰 청담동 며느리의 하루, 그것으로 점철되는 21세기 소비문화 같은 것을 기대해서도 역시 안 될 일이다.

"패션잡지 편집장이 냈다는 관용어로 얘기되는 게 싫었습니다. 그렇게 소개할 때 그려지는 카테고리가 있잖아요. 제 소설의 강점과 맹점이 분명한데, 맹점도 그렇게 '후진' 맹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어쨌든 척, 책을 펼쳤다.

그 구두를 신어 보면

제목이 주는 임팩트 때문이든, 편집자가 제일 맘에 들어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든 독자는 표제작부터 눈길을 주게 마련이다. 단편 '완전히 불완전한'은 수입의류 회사 사장의 딸이 아버지와 그의 애인, 아버지의 선배 사이에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이야기다.

해외로 떠난 어머니 대신 아내이자 연인처럼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나'는 아버지의 고객인 건축가와 연애를 시작한다. 연애 한 달을 넘기지 못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새 애인을 소개하고, 나는 이 여자와 특별한 감정을 나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여자가 애인인 건축가의 전처란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맞물린 관계들의 무한한 연속선 위에서 단지 그 순간만 사는 어린아이들. 우린 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완전히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다.' (58페이지)

소설의 모티프와 구성, 화자와 시점에 대해 묻는 필자에게 작가는 "그 전에 감상평을 듣고 싶다"고 되물었고, 필자는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은 '이멜다 마르코스의 항변'이라고 대답했다.

삼천 켤레 구두를 모았다던, 한때 필리핀 영부인이었던 이멜다 마르코스를 화자로 내세운 작품은 얼핏 매판자본의 단면을 포착한 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 사람의 구두를 신고(그 사람의 정서와 논리를 공유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욕망은 오롯이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란 통찰이 엿보인다.

'여자가 자신을 더 높이 들어 올리려는 욕구는 육체를 명예롭게 만들고, 기꺼이 세상에 내보이는 의식이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랄까요. 하지만 10센티미터 커진 삶을 다루기란 쉬운 게 아니에요. 높은 힐을 위한 공간은 호락호락 주어지는 게 아니죠. 구두야말로 여자가 나중을 위해 숨겨두는 모습이니까요.' (79페이지)

1인칭 시점으로 쓰인 8개 이야기("3인칭은 제 기질과 맞지 않아요.")의 공통점을 작가는 사무치는 정서라고 말했다.

"일상을 들춰보면 장미와 쓰레기가 같이 있고 거룩함과 남루함이 함께 있죠."

개인의 취향을 밑천으로 시대 보편 감각을 말하는 패션잡지의 특성처럼, 작가는 인터뷰에서도 비유와 예시의 구체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다. 그리고 그 기질은 소설집에도 담겨 있다. 인물의 행동과 인물이 겪게 된 사건, 그래서 취한 일련의 행동은 '환유의 말하기' 방식으로 오히려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흐려진다. 고로 작품 속 인물의 욕망과 번민, 환희와 갈등은 작가의 정서를 공감하는 독자만이 그 아득함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남에게서 빌려온 말로 내 입술을 통과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라고 할 때 주마등이 뭔가요? 그건 남이 해준 말일 뿐이고 고유한 각자의 관점은 아닌 거죠. 이 순간에 느끼는 공기와 밀도, 내 망막에만 맺히는 언어를 고수하는 건 글 쓸 때 중요한 강박이에요."

첫 단편집을 낸 작가는 첫 장편소설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싱글맘과 5살, 8살, 12살 된 세 딸이 모여 사는 이야기, 그 어린 딸들이 너무나 발칙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 문장 안에 우주가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인>이나 <타인의 얼굴>은 극미량의 세계를 다루는 것 같지만 밀도가 촘촘해서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문학을 통한 메시지보다는 문학이 주는 글쓰기 이면의 무엇, 그게 좋아요."

다시 장면 1로 돌아가자. 평균대 위에서 발레를 마친 우리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전광판의 불빛이 번쩍! 하고 꺼진다. "아, 이게 웬일인가요? 심사위원들도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데요. 그나저나 저 기술 몇 점 받았을까요?" 전광판 불빛처럼 페이드아웃.

다시 장면 2로 페이드인. 이것이 소설인가? 수필 미학과 소설 미학은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가? 잘 쓴 소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그의 소설을 읽고 난 후 독자의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부유할 테다. 모든 작가가 의도했지만 결코 만들지 못했던 상황의 연출. 이 소설의 미덕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