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과 연 구분 없이 과거ㆍ현재 공유하는 시간

기타 치는 노인처럼
김승강 지음/ 문예중앙 펴냄/ 8000원

'문학'을 '전문'으로 책을 내는 출판사는 흔히 시집 브랜드를 갖고 있다. 시가 언어예술의 정수라는 사실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 이들이 시집을 내는 건 판매부수를 떠나 문학의 권위 때문인 듯하다. 지난 해 12월 첫 시집을 출간한 문예중앙의 시선집은 파격적 형식의 작품과 신인들의 작품을 대거 선보이며 여타의 시집 브랜드와 차별화를 시도한다. 김승강의 <기타 치는 노인처럼>은 이 브랜드로 출간된 세 번째 시집이다.

이전 출간된 두 권의 시집(조연호의 <농경시>, 여정의 <벌레 1호>)이 일반 독자는 물론 평론가와 동년배 시인들까지 미간에 내천(川)자 주름을 만들만큼 난해함을 자랑한다면, 김승강의 시집은 다소 부담 없이 읽힌다.

'아내는 기차가 나아가는 곳은 잊고 가치 밖 풍경을 보고 좋아했다. 나도 손에 책을 펼쳐 들고도 글은 한 줄도 읽지 않고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기차 여행만 하고 평생 살 수는 없을까. 기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안 될까. 기차는 소실점을 향해 달렸다. 아내는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향해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기차를 타고' 부분)

시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음미하는 장르라면, 행간 하나 없는 이런 시들은 흔히 언어의 압축성을 겨냥하고 있고, 따라서 숨 막히게 다가온다. 하지만 김승강의 시는 앞서 보듯 이를 구체성으로 돌파한다. 단문이 만든 생활의 모습은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화자의 경험과 관찰에서 기록되는 삶의 보편성. <기타 치는 노인처럼>은 이렇게 읽힌다. 그런데 시인은 왜 '아득한 거리 없는' 시를 썼을까.

'처음부터 두부는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이었다. 두부장수는 며칠 동안 다른 동네를 돌아다니다 다시 올 것이다. 그는 사흘에 한 번 왔다. 사흘을 기다려도 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사흘은 뭔가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잊을 만하면 그는 왔다.' ('두부를 위하여' 부분)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하는 방식은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 교육의 산물이다. 혹자에게 시간은 '무언가 되어가고 있는' 지속의 개념이고(이를테면 베르그송), 혹자에게 시간은 계절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순환 고리다(또한 이를테면 파스칼 키냐르).

우리는 과거에 켜켜이 쌓인 기억의 총체와 현재 겪고 있는 경험 사이의 공유와 진동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예컨대 내가 먹은 무수한 사과에 대한 기억의 총체로 사과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가지고, 식탁 위 홍옥과 아오리를 보며 '이것이 사과다'라고 유추해 말하는 것이다.

고로 나와 타자가 '지금 현재'의 이 순간에 소통할 때, 이 소통은 완벽할 수 없다. 나는 이미 과거와 현재가 진동하며 만든 경험의 총체로서 타인을 만나고 있으므로.

촘촘하게 쓰인 김승강의 시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공유하는 시간을 품고 있다. 행과 연 구분 없는 이 시가 아득한 거리를 가지는 이유다. 고로 이것은 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장황한 의미부여 없이 김승강의 시는 쉽게 읽힌다.

'그래 신파라서 미안해// 엄살 부리지 않을게/ 사기 치지 않을게' 시집의 맨 앞에 적힌 시인의 말은 이 보편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막스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펴냄/ 1만 3000원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정치철학 강의' 시리즈 첫 권. 막스 베버에서 시작해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제임스 매디슨 등 고전 철학자들의 대표적인 텍스트를 소개한다.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가 이들 철학자의 주요 사상, 생애, 대표작을 정리하고, 대표작을 번역해 엮는 형식이다.

유려한 문체의 최장집 교수는 이번 책을 중고등학생에게 수업하듯, 쉽고 간명하게 썼다. 번역해 함께 엮은 대표작에는 용어나 내용에 대한 각주를 달아 이해를 도왔다.

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창비 펴냄/ 1만 1000원

중견작가 공선옥의 장편소설. 지난해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연재한 작품을 묶었다. 소설은 재개발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젊은 부부 영희와 철수가 살 곳을 찾아 시골 마을을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재개발, 철거, 투쟁 등 말만 들어도 뻣뻣해지는 소재를 밑천 삼아 작가는 정치적이면서 순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펼친다.

돈의 본성
제프리 잉햄 지음/ 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 2만 3000원

총체적인 사회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화폐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는 책. 화폐의 개념과 역사, 화폐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분석하고 최근 나타나고 있는 통화적 무질서 현상의 사례들을 통해 정통 경제학에서의 화폐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교환수단, 가치 저장 등 화폐의 4대 기능과 주류 경제학의 상품화폐론을 비판하며 화폐가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이자 '청구권'이라고 말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