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소설가 박범신39번째 장편 출간, 사회 폭력 재생산 구조 등 파헤쳐

조세희와 김승옥이 단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작가라면,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는 무수한 이야기들로 기억되는 작가다. 전자가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기록된다면, 후자는 다작으로 기록되는 작가들이다.

소설가 박범신이 얼마 전 등단 39년째를 맞아 39번째 장편 소설책을 냈으니 그는 단연 후자로 기록될 게다. 국내 상당수 '다작' 소설가가 대하소설을 한두 편 쓰며 이야기를 큰 덩어리로 발표한 것에 반해, 반해 박범신의 이야기는 제각각이다.

1946년 충남에서 태어나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을 발표하며 문제작가로 주목받았고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80년대 인기 작가로 활동했다.

예전 인터뷰를 했던 어느 작가는 "우리에게 70,80년대는 박범신과 최인호와 김홍신의 시대로 기억된다"고 말했는데, 그 시절을 백낙청과 김우창과 4K(김현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의 시절로 기억하는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아리송했던 그 작가의 정체성을 파악했다.

빛나는 상상력, 역동적인 서사, 화려한 문체 등 이 시절 박범신 소설의 특징은 대중소설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고, 그는 한국사회 문제를 밀도 있게 그린 소설로 인기 작가로 활동했다.

꽤많은 비평가와 대중이 최근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신춘문예와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상당수 작가들은 여전히 순소설 고유의 모양새가 있다고 믿고, 이것을 지향한다. (그러니 그 시절을 "박범신과 최인호와 김홍신의 시대로 기억"하는 작가가 자신은 순수도 대중도 아닌, 중간 소설을 지향한다고 말해도 그 결과물은 기실 대중소설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고 보는 게 무방하다.)

그의 문학적 방향이 바뀐 건 9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다. 93년 절필을 선언하고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를 다녔고 이후 96년 중편 '흰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이전 자신의 소설과 다른 형식의 작품을 선보였다.

단편집 <흰소가 쓰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 <빈방>, 이주노동자를 그린 장편 <나마스테> 등은 이 변화의 지점에서 쓰인 작품들이다. 이야기의 주제는 진중하고 말하기 방식 또한 이전보다 묵직해졌다.

예술가의 내적분열을 뛰어난 미학적 구조로 형상화한 <더러운 책상, 30여 년의 현대사를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애증을 기록한 <외등>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 2000년 들어 발표한 <촐라체>, <고산자>, <은교>는 '갈망 3부작'에 속한다.

최근 작가는 <비즈니스>를 비롯해 지난 주 출간한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등 일련의 소설에서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인간의 욕망을 엮어내고 있다.

'나는 이번 소설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잔인하고 무참하게. 쓰면서 내가 왜 몸서리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가 배후에 거느리고 있는 가감 없는 현실이다. (…) 잘 차려입고 고상한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이대어 묻고 싶었다. 당신의 가슴속에 진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당신은 진짜 인간이냐고.'

<문예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목숨보다 더 사랑한 여자에게 죽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사랑을 그리며 사회 폭력의 재생산 구조, 이간 마성의 근원에 대해 묻는다.

작가 특유의 흡입력에 마술적 리얼리즘, 하드고어란 파격적 스타일이 더해진다. 앞으로 새롭게 펼칠 또 다른 문학적 변화가 그려지는 작품이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