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르 이 저자] 가야트리 스피박 등 안다는 것의 기쁨과 고통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몸을 쓰며 사는 분들에게는 삶의 지혜가 있죠. 공부나 독서로 알 수 없는."

이번 주 한 작가와 이런 말을 나눴다. 말과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은 선악이나 희노애락을 말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같은 것을 갖고 있다.

매일 권력자들을 만난 30년 차 기자와 매일 바다에서 전복을 딴 30년차 해녀의 지혜를 비교할 때, 기자의 지혜가 해녀의 지혜보다 더 뛰어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해녀의 지혜는 몸으로 익힌 것이고, 그것은 경험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지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녀는 밥 먹고 글만 써온 기자보다 글을 못 쓴다. 사람들이 기자의 언어에 더 주목하는 이유, 기자가 더 많은 말을 하는 이유일 게다.

인도의 문학평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꽤 많은 지식인들이 해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입장에서 해녀를 말하고 있을 뿐이며 해녀는 결코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 해녀는 기자보다 말을 잘 못하고, 설사 말한다고 해도 일반인들은 해녀의 지혜를 알아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제된 수많은 해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해녀에게 말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의 요지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1942년 인도에서 태어난 문학평론가이자 페미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연구가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역하며 미국 문단에 알려졌는데, 이때 지도 교수가 미국문학 비평의 대가 폴 드 만이다.

지금은 콜롬비아대학 교수로 있다. 이력에서 보듯 그녀의 이론은 해체론,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의 이론 지형과 복합적으로 연계돼 있어 난해하고 복잡하다. 얼마나? 또 어떻게?

앞서 해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저렇게 우리 내부에서 배제된 해녀, 어부, 농부, 노동자 같은 사람들을 역사학에서 '서발턴'(Subaltern)이라고 부른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에서 검열을 피해 '프롤레탈리아'란 말을 대신해 쓴데서 유래하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하위주체 쯤 된다.

스피박은 그람시의 개념을 '지금 여기'에 도입한다. 즉 전지구적 자본의 재배치라는 현재적 조건에서 포스트식민연구, 페미니즘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것. 그녀가 페미니즘, 제 3세계 하위주체 여성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이들이 하위주체 중에서도 하위주체를 대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견 선명해 보이는 그녀의 말이 어지러워지는 지점은 해체론을 만나면서다. 해체론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명명을 통해 가능한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란 노래(가시나무)처럼 그 파악과 포획의 망을 빠져나가거나 넘쳐나는 잉여, 초과, 잔여의 지점이 언제나 있다고 지적한다.

스피박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 이 개념을 도입한다. 명명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를 각인하는 것 또한 잉여, 초과, 잔여가 발생하는데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은 제국주의의 기획과 같이 갔다는 것이다.

요컨대 권력이란 대상의 포획이기 때문에, 대상의 파악인 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루, 공모, 야합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 때문에 하위주체는 언제나 그들의 말을 가질 수 없고, 그들이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하위주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이 어지러움의 절정이 1987년 출간된 정치문화에세이 <다른 세상에서>(1987)다. 이외에 <포스트식민 비평가>(1990),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등이 있다. 논리의 도약과 플래시백이 가득한 그녀의 책들은 안다는 것의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올해 초 <다른 여러 아시아>가 번역 출간됐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