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승부수, All Or Nothing?

10·26 재·보궐선거 지원을 공식화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6일 밝은 표정으로 국회 본청 계단을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4년여만에 일선 재등장
새바람 속 뒷짐 지다가는
입지 축소 우려 판단한 듯

직접 유세보다 측면 지원
사실상 대선 '모의 수능'

'안풍' 잠재우지 못하면
정치 생명 단축 불보듯

7년전 천막당사 비장감 팽배
최근 행보=정치 도박이냐
나름대로 승산 판단이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승부수를 던졌다. 박 전 대표가 6일 10ㆍ26 재보선의 선거 지원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4년여 만에 정치의 최일선으로 재등장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7일 오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자리에 앉고 있다. 연합뉴스
박 전 대표는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이후로는 당내외 정치 현안에 대해 가급적 말을 아끼며 소극적 행보만 거듭했었다. 세종시 문제와 복지 당론 등 여권의 핵심 정책이 자신의 구상과 다를 때에만 우회적으로 언론에 불만을 표시했을 뿐,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부담을 주지 않고, 여당도 지도부를 중심으로 정치 현안을 풀어가는 것이 순리라는 표면적 이유를 댔지만, 속으로는 노출 빈도를 아껴 내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전격 등장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셈법이 들어있었다. 이른바 장막 뒤의 정치였다. 주변에서도 "귀한 물건일수록 늦게 개봉해야 한다"는 논리로 박 전 대표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등장으로 상황이 180도 변했다.

무소속으로 나선 박원순 후보가 이 같은'바람 정치'에 힘입어 기성 정치권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자 더 이상 박 전 대표도 정중동의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워 진 것이다.

박 전 대표는 6일 국회 기획재정위 국정감사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을 만나 승부수를 던진 이유를 '정치의 위기'라는 명제로 설명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그 동안 정부와 여당이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한발 물러나 있었는데 지금 상황은 한나라당뿐 아니라 우리 정치 전체의 위기"라면서 "(선거 지원에) 힘을 보태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어 "정당의 뒷받침 없이 책임 있는 정치ㆍ정책을 펴 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정당 정치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대로 가다간 '안풍(安風ㆍ안철수 바람)'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바람에 의해 정치권 전체의 지형 자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다분히 들어 있다. 계속 '뒷짐'을 지고 있다가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자신의 입지 축소는 물론, 자칫 기존 정당 체계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한나라 vs 통합 야권 구도

특히 박 전 대표는 "이번 선거는 대통령 선거하고 관계없는 선거"라고 일각의 '대선 전초전 격'이라는 관측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박 후보와 부산에서는 동구청장 선거를 지원하는 문재인 노무현재단이사장, 기타 지역에서 민주당 등의 협공이 이어진다고 보면 이번 재보선은 한나라당 대 통합된 야권의 싸움인 셈이다. 사실상 내년 대선에서 재연될 한나라당 후보와 야권 단일 후보의 대결과 같은 선거전이 전국 곳곳에서 조각조각 나뉘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박 전 대표가 선거 지원을 선언했으니, 야권의 공세가 각 후보는 물론 박 전 대표에 집중될 것이 자명하다. 사실상 박 전 대표에 대한 대선 모의고사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선거 지원 방식과 관련, 일단 지금까지 강조해온 '신뢰 정치'나 '새로운 정치'의 범주 내에서 조금 더 진화된 형태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평소 강조해온 대로 새로운 복지를 키워드로 내세울 것으로 여겨진다.

선거의 화두로 복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지금까지 세종시 원안, 동남권 신공항 추진 등 국토균형발전의 틀을 벗어나 처음으로 보편적 사안을 국민에게 호소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관련 유승민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 본인의 방식대로 열심히 도울 것"이라면서 "과거와 같이 대규모로 마이크를 잡고 군중을 많이 모으는 식은 아닐 것"이라고 말해 직접적인 선거 유세보다는 한나라당의 정책을 부각하는 '측면 지원'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해 기초단체장 선거가 있는 대구와 부산 충남ㆍ북, 강원 등지를 돌며 후보자의 동선과 다르게 움직이며 한나라당 후보의 지지를 호소할 것으로 보인다.

또다시 정치 시험무대의 한 복판에 서게 된 박 전 대표의 앞날은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확연히 갈리게 된다.

먼저 서울시장 선거 등 주요 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승리한다면 박 전 대표는 '제3의 바람'을 잠재운 가장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입지를 굳건히 한다. 지금도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대선주자이지만, 이번 선거도 승리로 이끌 경우 '차기 0순위'란 닉네임이 추가되는 것은 물론이다.

반면 선거 패배는 박 전 대표에게 치명적이다. 정치권에 불어 닥친 '안풍'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보수진영에서조차 "이젠 박근혜로는 대선에서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뛰어든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놓고 '정치 생명을 건 도박'이란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박 전 대표 주변에서는 "이번 선거는 나경원 선거이지, 박근혜 선거가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정가에서는 칼을 뽑아 든 박 전 대표의 모습에서 사실상 박 전 대표가 주도하는 선거로 규정짓는 분위기이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2004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의 천막 당사 당시의 결기가 느껴진다"고 박 전 대표의 비장감을 전했다.

야권의 숨겨둔 무기 안철수

야권은 박 전 대표의 등장에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먼저 두 가지 부분에서 우려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지원 자체로 인한 위력도 문제거니와, 과연 박 전 대표가 지는 게임에 승부수를 던지고 나왔겠는가 하는 점이다. 비록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에게 각종 여론조사에서 9%가량의 우위를 보이고는 있지만, 칩거하다시피 한 박 전 대표가 정치 생명을 단축시킬지 모르는 선거판의 전면에 뛰어 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선 것 아니겠느냐 하는 분석에서다.

하지만 오히려 박 전 대표의 등장으로 선거전이 더 쉬워졌다는 평가도 내부에서 나온다.

보수 대 진보, 조직 대 바람, 구 정치 대 신 정치 식으로 선거판이 단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는 판단에서다.

야권은 일단 박 전 대표의 등장으로 보수층 결집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란 점을 부각해 진보진영을 결집하는 한편 유신시절을 경험한 40~50대 넥타이 부대를 향해 야권 후보의 지지를 호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야권은 또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를 연결 지어 현정부 심판론으로 분위기를 유도할 태세다. 여기에다 박 전 대표를 구 정치 세력의 정점이나 낡은 기성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덧씌워 젊은 층으로 하여금 거리감을 갖게 한다는 복안도 세울 수 있다.

이와 관련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박 전 대표가 유신독재와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다고 볼 것"이라며 "(박 전 대표의 선거 지원이) 득도 있겠지만 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은 여기에 또 다른 무기 하나를 숨기고 있다. 안철수 원장이다. 이중 삼중의 박 전 대표 때리기에 집중하다가 선거 막판 안 원장의 유세 지원을 극적인 이벤트로 만들어 선 보이면 선거전의 분위기를 야권 쪽으로 확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다.

만일 안 원장이 선거 도우미를 자처해 어떤 형태라도 박원순 후보의 승리에 일조한다면, 많은 이들은 안 원장이 박 전 대표를 누른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다. 안 원장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정치적 무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안 원장은 아직까지는 선거 지원에 대한 확답을 한 적이 없다. 박 전 대표가 즐겨 쓰던 '장막 뒤 정치'를 안 원장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셈이다.

박 후보 측 송호창 대변인도 "아직 공식 비공식적으로 안 원장과 접촉한 일이 없다"면서 "나중에 조언을 구할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연락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거가 막판 과열되면서 진보 진영에서 안 원장의 선거 지원을 애타게 요청하는 여론이 높아질 경우, 안 원장이 이를 마냥 외면하기는 힘들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전 대표의 선거전 지원 결정으로 이번 10ㆍ26 재보선은 내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 한나라당 대 반(反) 한나라당 연합군인 통합 야권의 승부, 박 전 대표 대 안 원장의 대리전 성격이란 복잡한 의미를 지니게 됐다. 보수와 진보 진영의 내년 대선 승부를 앞둔 전초전이 펼쳐지고 있다. 사활을 건 양측의 전면전이다.



염영남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