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보이지 않는' 부부


진료실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부부들이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과연 상황이 나아질 수 있겠는지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정말로 심각하고 회복이 어려운 경우는 외도나 의사소통 실패 또는 심지어 폭력도 아니다. 필자에게 가장 어려운 경우는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 부부들이다.

면담을 해보면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결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남성은 신부를 선택할 때 집안을 꾸려나갈 적당한 상대를 선택한다.

시부모를 챙기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자면 된다.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 가끔 함께 부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자신의 역할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벌어오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이런 남성은 부부의 정서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인의 하소연을 바가지나 잔소리로만 듣는다. 자신의 정서적 욕구는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해소한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사랑보다는 자신의 소원을 충족시켜 줄만한 남성을 배우자로 선택한다. 그래서 남편의 조건으로 적당한 학벌과 경제적 수입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남편의 욕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부부의 성관계도 돈 벌어오느라 수고하는 남편과의 거래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남편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거나 가장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미흡하게 되면, 남편을 위로하거나 그 역할을 대신 맡으려 하지 않고 신랄하게 남편을 비난한다. 남편은 이런 부인의 태도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없으므로 좋은 부부관계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부부불화는 더 깊어만 간다.

치료가 어려운 또 다른 경우로는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인데, 대표적인 예로 남편에게 깊은 실망을 안고 사는 부인들이 있다. 결혼 초기에 며느리 노릇을 잘못한다고 타박을 주었거나 출산 후 힘든 시기에 집안일 돕기를 거절한 남편에 대해서 부인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반복적인 외도나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었거나 문란한 생활습관으로 가정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남편과는 하루도 더 같이 살기가 싫다고 말하는 부인들이 적지 않다.

이런 부인들은 옆에 있는 남편이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도저히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편들은 “이미 지난 일을 자꾸 들춰내서 무엇 하나? 앞으로 잘하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하지만, 부인의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 쩔쩔매다가 결국에는 노력하기를 포기하고 만다.

이 남편들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 ‘한’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게 할 정도로 강한 힘이 있다면, 그 표현을 무서워하거나 억압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긍정적으로 발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 ‘한’은 여성들이 지닌 관심, 배려, 양육 등의 긍정적 특성이 정상적으로 발휘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감상이다. 이런 부인의 ‘한’이 풀어지고 긍정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남편의 ‘사랑’이다.

남편은 부인의 가슴속에 한이 맺히지 않도록 부인의 심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적절한 위로와 감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부인 자신은 자신의 쌓인 분노가 부부와 가족 모두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는 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불우한 삶에 대해 남편을 탓하면서 우울과 분노로 남은 인생을 소모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른 남편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잘못한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의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나겠다는 결단이다.


박수룡 www.npspecialist.co.kr
입력시간 : 2008-11-2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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