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결혼하고 24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온 한 부인은 이웃집 부인과 요양보호사 자격취득을 위한 교육을 받기로 약속했다가 남편의 반대로 포기하게 되었다.

부인은 그 동안 '이번 일 말고도 사사건건 자신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여 있었다. '남편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게 된 부인의 좌절감은 남편에 대한 분노만으로 그치지 않고 무력감과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부인의 말을 충분히 들어보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남편의 문제가 크기는 하지만, 부인은 남편이 반대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처럼 많은 부인들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자신이 아닌 남편에게 있는 것처럼 믿고,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도 남편을 원망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떤 부인들은 이 부인과는 다르게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자신의 선택을 지켜 낸다. 이런 부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실천하기 위해서 남편과의 끊임없는 불화를 감수하거나,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남편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서 가정살림과 바깥일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다 잘해내려고 상당한 무리를 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두 가지 역할을 다 잘해낼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못마땅해 하는 남편의 태도가 바뀌거나 남편의 비 협조에 대한 부인의 불만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부인이 교육을 받으려는 욕구를 가지지 말았거나 남편이 선선히 동의를 해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일단 일이 벌어진 후에는 부인이 포기하든 고집을 부리든 어느 경우에나 남편과의 갈등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보면 차라리 부인이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게 나았을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적잖은 부인들이 강한 남편에 눌려서 자신의 의견은 전혀 없는 것처럼 살면서 '거짓 평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존심을 포기하고 살아간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들 보기에는 물론 스스로도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는 부인들도 겉으로 보이지 않는 '숨은 분노' 때문에 우울증이나 신체화 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 부인이 자신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서 어떤 계획을 가진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또한 남편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좌절감을 겪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부부간에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면 분노 감정이 쌓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쌓인 분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소득 없는 부부싸움을 계속하거나 혼자서 '화병'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욕구와 기대가 좌절되고 자신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 당하는 상황에서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분노 감정 자체는 그 상대가 누구거나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관계없이 나타나는 본능적 반응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의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각자의 인격적 성숙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 분노의 힘으로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욕구를 희생하여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쾌락의 유혹을 이기고 학문적 성취나 경제적 성공을 달성한다.

이 힘을 잘 활용하지 못한 사람은 소모적인 불만을 일삼거나 심한 경우에는 사회적인 피해를 끼친다. 분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부인이 자신의 좌절감과 남편에 대한 분노를 서둘러 억누른 대신에 분노의 힘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그 교육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좀 더 철저히 살펴보고, 어떻게 남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연구하고, 남편이 끝까지 반대하는 경우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깊게 준비해서 다른 결과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남편이 반대하는 이유와 남편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을 수도 있다. 부인의 분노는 이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이 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서 실천하게 하는 지침으로 활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박수룡 www.npspeciali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