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분노라는 정서적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화가 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모든 정서적 경험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소 별개의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인식과 결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화나게 하는 것에서 멈추게 되고, 분노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힌 희생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성의 조절 하에 있는 분노 감정은 단순하게 표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원인과 대상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리고 분노의 크기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표현의 강도가 달라진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원하는 목표를 얻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안에 대하여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둔다.

즉 극도로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의 어떤 점이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인지,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애초에 자신이 기대하였던 것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는지, 잘못의 책임이 과연 상대에게만 있는 것인지, 상대의 잘못과는 별도로 자신에게는 어떠한 책임이 있는지,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는 않는지 등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상대를 바꾸려는 욕구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감정을 상대에게 퍼붓게 된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비효율적인 싸움으로 이어지거나 상대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게 되므로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만다.

반대 경우로 보이지만 아무리 싸워봐도 상대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적인 체념으로 숨어들거나 자신의 약점 때문에 상대의 부당한 요구에 복종하며 속으로 화병을 쌓는 사람도 그 속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동공격적 분노로 서로에게 낭패를 끼치거나 하는 것에서 그치기 쉽다

이처럼 분노 표현이 비효율적인 싸움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대화기술을 익혀야 한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신이 싫은 것은 피하고 싶기 마련이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의 의견을 순순히 따를 사람은 없다.

비록 겉으로는 비난을 수긍하는 것으로 보여도 속으로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하려 하거나 오히려 상대의 잘못을 들추어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따라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자신의 느낌을 알리려고 애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맨날 늦게 오느라 가사나 육아에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에게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말보다 '당신이 늦을 때면 당신이 괜찮은지 걱정된다, 아이를 나 혼자 키우면서 잘못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기다리느라 외로웠다'는 표현이 훨씬 덜 공격적인 표현이다.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공격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더 사실적으로 전달할 뿐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상대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를 내는 대신에 상대에게 자신이 바라는 점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응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 할 때에는 상대가 자신의 바램에 부응하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는 나와 다른 존재이므로 나의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좋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기대한다면 자신이 아직도 비현실적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 수 있다. 때로는 모처럼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는데 상대가 더 심하게 반발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자신이 다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자신은 어떤 대안이 있는지, 필요하다면 누구에게 어떠한 도움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준비를 하여야 한다.

끝으로 분노의 표현은 단순한 감정표출을 넘어선 자기 인격의 표현이기 때문에 때로는 상대와의 결별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럴 때 과연 자신이 상대를 떠날 수 있겠는지, 그럴 수 없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떠나기 위해서나 떠난 후에 자신이 견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들에 대한 인식이 동반되어있을 때에야 비로소 분노가 상황을 바꿀 수 있게 된다. 또한 이처럼 힘있는 결단을 하기 위하여 자신을 단련할 만한 용기를 주는 것도 바로 분노 감정의 에너지다.

분노의 긍정적 힘이 개인과 인류 역사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 각자의 분노를 개인적인 분풀이로 그치지 말고 더 깊은 자각과 넓은 변화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수룡 부부치료클리닉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