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재혼 부부 본인들의 어려움도 크지만 부모의 재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녀의 정신적 혼란과 고통은 예상 외로 크다. 자기 부모의 재혼을 앞둔 자녀는 이미 친부모의 죽음이나 이혼을 겪은 후인데, 자녀의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죽음이나 이혼은 자녀의 자아정체성 확립에 상당한 지장을 준다.

그래서 사실과 상관없이 자녀는 자신을 떠난 부모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런 자신을 다른 사람이 사랑해줄 것인지 등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 이런 자녀들은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상상하고 있으며, 새로운 부모가 생기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자라난 후에 자신의 배우자 선택과 자녀양육에까지 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성장에 따라 적절하게 사실을 알려주고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함께 하는 것이 좋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자녀들은 그 이유가 충분하다면 자신의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해온다.

자녀가 부모의 사별이나 이혼에 이어서 부모의 재혼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망하였거나 이혼하여 같이 살지 않는 부모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부터 미리 알려주어야 한다. 이 때에는 자녀가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시간을 두고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서 자녀에게 알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 관련되는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조차 못하게 하는 어른들이 아직도 많다. 이는 어린 자녀의 마음에 굳이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또 시간이 지나면 자녀도 과거를 잊고 현실에 맞추어 살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자녀는 자신의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며 근본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음에는 자신이 새 배우자를 찾고 있음을 알리고 자녀의 심정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자녀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포기나 강행을 하기보다는 오랜 대화를 통하여 서로의 입장을 알아가는 것이 서둘러서 재혼한 후에 생기는 문제들을 줄일 수 있다.

자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때로는 단 둘이서 또 때로는 새 배우자를 포함하여 세 명 이상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이 때에는 어른이 먼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것이 자녀도 솔직한 의견을 표현하게 할 수 있다. 만약 자녀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더라도 일단 자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이 자녀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녀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사실은 사실대로 알려주면서 자녀와의 감정적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새 배우자의 자녀와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도 필요한 자세이다.

재혼을 하려는 사람은 초혼의 경우보다 시간적으로 쫓기는 경우가 많은데, 성공적인 재혼을 위해서는 초혼보다 더 오랜 준비가 필수적이다. 특히 자녀와 새 배우자가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적절하게 준비된 만남과 교제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였더라도 전혼 가정의 자녀가 새 부모와 친자관계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부모의 재혼으로 한 집에서 형제처럼 살게 된 자녀들의 경우에는 더 어려움이 많을 수 있다. 재혼 부모는 상대의 자녀를 자신의 자녀와 차별 없이 대하면서 자녀들끼리도 서로 친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라겠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무리한 기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노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돌아오지 않을 때 실망하여 노력을 중단하거나 과도하게 화를 내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상대도 나름대로 불편함을 견디며 애쓰고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재혼은 불행하게 끝난 초혼을 보상받는 기회가 아니라 ‘적어도 이전보다는 나아지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박수룡 백상신경정신과 의원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