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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요리를 위한 변명
고객 요구와 셰프 영감 합쳐진 업그레이드 결과
내공 없는 요리사의 방패막으로 남용되기도





황수현 기자 sooh@hk.co.kr
사진=임재범 기자 happyyjb@hk.co.kr





1-'버섯 불갈비 샐러드'
2-'문어 샐러드'푹 삶아 부드러워진 문어를 레몬, 올리브오일, 허브에 무쳐냈다.
3-놀라운 숭어 요리'통째로 튀긴 숭어에 고수와 초생강, 양파를 곁들였다.


저는 퓨전 요리입니다. 정확한 이름을 밝히라고 하면 버섯 불갈비 샐러드입니다. 오늘은 저를 위한 변명을 하고자 합니다. 변명이란 다 쓸데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라고요? 하지만 저는 결과에 대한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게도 제 이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퓨전이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접두사가 되었죠. 퓨전 음식뿐 아니라 퓨전 음악, 퓨전 한복, 퓨전 사극, 퓨전 소설… 지금 당신의 표정이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아마도 그 가벼움에 치를 떨고, 어느 정도 정통성에서 벗어났으며, 얼마나 고고한 전통을 손상시켰는지를 가늠하겠지요? 마치 잘못 들어온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지금은 자신의 음식에 퓨전이라는 단어를 붙이길 두려워하는 요리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요식업계에서 퓨전이라는 말은 ‘근본을 알 수 없는’ 또는 ‘맛을 보장할 수 없는’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 요리사나 붙잡고 당신이 만든 이 음식은 퓨전이냐고 물어보십시요.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마냥 펄쩍 뛸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따라 일부를 변형한 것뿐이지, 그 정신만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대답하며 말이죠.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퓨전 음식이라는 단어를 계속 들먹이다 보니 마치 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한창 퓨전 음식 붐이 일었을 때지요. 특급 호텔들이 주도한 신드롬에 많은 레스토랑들이 뛰어 들었습니다. 뭐든지 지나친 관심은 해로운 법이지요. 퓨전이라는 단어는 흔해져 곧 길거리에서 발로 채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요리사는 아구찜을 만드는 데 고추 가루가 없자 핫 소스를 넣고 퓨전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이는 튀김을 바삭하게 만드는 법을 몰라 눅눅한 튀김을 만들어 낸 후 ‘퓨전 튀김’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퓨전 음식은 내공 없는 요리사들의 방패막으로 더 자주 쓰이게 되었죠. 관심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벌어진 엉터리 쇼였습니다.

이제 한바탕 소란이 걷히고 본바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퓨전이라는 단어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지금도 퓨전 레스토랑은 있습니다. 왜일까요? 퓨전 음식은, 그러니까 셰프의 아이디어와 천재적인 감각을 거쳐 기존의 맛과 모양을 탈피한 이 창의적인 음식은 요리의 발전과 함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퓨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 전에도 퓨전 음식은 죽 있어 왔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럴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통성에 대한 애착을 전혀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음식에는 회귀 본능이라는 것이 있지요. 먹어본 맛, 아는 맛을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맛있다, 맛없다의 기준은 기존에 먹었던 음식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삼계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에 대해서는 적어도 지금까지 먹었던 삼계탕과 같은 맛을 기대하게 마련입니다. 정통에 대한 고집도 아마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향수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옛 것에서 느끼는 감동 못지 않게 항상 새로운 것에 집착하지요. 퓨전 음식은 다양한 음식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결과입니다. 유행이 변하듯이 음식도 변합니다. 새로운 것들은 비록 익숙한 맛은 없지만 항상 발전된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지요. 과학의 발달로 스판덱스 같은 편안한 소재가 탄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 자신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가 누군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버섯 불갈비 샐러드입니다.

저는 한국의 소갈비를 서양의 샐러드와 접목한 요리입니다. 일반적인 그린 샐러드 위에 닭고기나 새우 튀김 등을 얹은 음식을 많이 보셨겠지요? 저의 외관도 그와 같습니다. 다만 소갈비 아래에 깔린 야채들이 버섯, 상추, 마늘, 고추 등 쌈채소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샐러드 한 접시로 소갈비집의 식탁을 재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버섯 구이와 갈비 샐러드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하는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제가 탄생했습니다. 이렇듯이 퓨전은 부족함을 채우라는 고객의 요구와 요리사의 영감이 합해져 이루어진 업그레이드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대체 어느 나라 요리냐는 말은 제가 가장 자주 듣는 욕입니다. 저는 퓨전 소설이나 퓨전 음악, 퓨전 사극까지 변호해주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음식의 미덕은 그 뿌리가 아니라 맛이라는 사실입니다. 음식에 원조는 있어도 원칙은 없지요. 저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대중의 호응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저의 변명이 부디 정통 요리를 고수하는 셰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음식을 하다 보면 어느 한 장르의 매력에 빠지게 마련이지요. 일식의 정갈한 담음새와 맛, 이탈리안 요리의 신선한 투박함, 프렌치 요리의 귀족적인 섬세함… 그러나 한 가지로 만족하지 못하는 셰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들이 기존의 맛에 만족하지 못하는 손님과 만났을 때 퓨전은 언제 어디서나 번뜩이며 출현합니다.

아, 물론 퓨전 음식에도 지켜져야 할 원칙은 있습니다. 섞는다고 왕도는 아니지요. 그것은 모든 음식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재료의 개성을 잃어버리지 말 것입니다. 생선은 생선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맛을 최대한 뿜어내야 합니다. 만약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명분 하에 재료의 맛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아무리 셰프의 빛나는 감각이 들어간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하나 간과되기 쉬운 것이 질감입니다. 음식에 원칙은 없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는 미덕은 있게 마련이지요. 튀김은 바삭한 것이 미덕이며 떡은 쫄깃한 것이 정석입니다. 각 음식 특유의 질감을 살리면서 변형을 시도하는 것이 훌륭한 퓨전 요리의 몇 안 되는 조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퓨전 음식을 믿지 못하시겠다구요? 아, 그렇다면 이건 진정 먼저 태어난 이들의 텃세라고밖에 볼 수가 없겠는데요?

도움말: ‘스타 쉐프’ 김후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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