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쓰는 '사랑과 전쟁'

사랑에는 연애감정처럼 뜨거운 열정적 요소 외에도 따뜻한 공동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상적 요소가 있다.

그런데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책임감을 유지하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가기 위해서는 열정적 요소보다 일상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인격적으로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이 단순한 감정적 현상을 넘어서 인격 발달에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격발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자신은 물론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을 보아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서 인격장애자들은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장애에는 자신의 충동에 따라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자신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타인을 착취하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그리고 자아 주체성이 불안정하여 자기파괴적 행동을 반복하는 경계성 인격장애가 포함된다.

또 정상적인 자신감이 결핍되어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상대의 거절을 두려워하여 아예 모든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성장과정에서 건강한 상호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장애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치료를 위한 자발적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부모 또는 부모의 대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거나 부모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고 자란 사람들도 사랑하는 능력에 장애를 갖기 쉽다.

그래서 아예 사랑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거나 어떤 상대와도 결혼하기를 거절한다. 설령 결혼을 하더라도 배우자가 언제든지 자신을 공격하거나 배신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배우자와 가까워지는 것을 불안해 한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기를 바라는 욕구와 자신의 이런 욕구를 상대가 거절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거절하려는 조급함이 공존하고 있어서,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기보다는 짧은 외도를 반복하거나 음란물처럼 비교적 안전한 대리물을 찾는다.

이런 사람들은 치료과정을 통해서 부모가 불행하게 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은 부모와는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 부모의 불행을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사랑을 실천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부모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아주 많다.

이들과 달리 사랑을 경험했던 보통 사람들이 사랑할 능력을 상실하거나 그럴 기회를 포기하게 되는 가장 많은 이유는 과거의 사랑에서 받은 실망과 분노 때문이다.

사랑하던 상대에게 배신이나 실연을 당한 상처가 너무 커서, 다시는 그런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을 거라고 믿거나 혹시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오더라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상태가 만성화되고 일반화되면 좋은 일에도 즐거워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크게 상처를 받곤 한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악화되어 차츰 자기 고립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비록 사랑하던 상대를 잃었지만 그 상대를 통해서 자신이 경험하고 발달시킨 사랑의 능력은 자신에게 남겨져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지금의 슬픔이 지나면 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사랑으로 인한 한 두 번의 쓰라린 상처를 얻고도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하게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하여 자신과 상대가 각자 또 함께 성장하고 발달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포함하는 경우를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단순한 연애가 아닌 진정한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박수룡 백상신경정신과 원장 sooryong@medima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