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 VS 극소수 마니아… 패션 천재들의 두 가지 소통 방식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다.

버버리는 이번 2010 S/S 컬렉션을 본토인 영국에서 치렀다. 런던패션위크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금의환향한 버버리를 향해 영국의 패션계는 벅찬 기쁨과 화끈한 관심을 표현했다. 결국 평소보다 스케일이 큰 쇼였음에도 불구하고 쇼장에 입장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지자 버버리 측에서는 버버리닷컴을 통해 실시간으로 쇼를 생중계했다. 이게 이상하다는 말이다.

'인터넷 시대, 경계 허무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라는 가제와 동시에 떠오르는 의문은 '버버리의 팬 층이 월드와이드웹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방대한가? 아니, 버버리는 정말로 그 많은 사람들과 전부 소통하고 싶은 걸까?' 하는 것. 이런 의문은 알렉산더 맥퀸이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폴로워(follower)들에게 "It's time to start again" 이라는 메시지를 날리고 쇼를 시작했을 때 재등장했다.

그러나 곧 또 다른 패션 천재의 유난으로 인해 스스로 이 생각을 뒤집을 일이 생긴다. 올해 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컴백한 피비 파일로는 몇몇 유력 패션 잡지들에게 본의 아니게 열패감을 안겨 줬다. 의상 협찬하는 잡지를 패션으로 정평 난 6~7개 매체로 한정한 것. 그들이 지정하는 잡지 외에는 의 의상을 가져가서 찍을 수 없다는 뜻이다. 홍보 해준대도 싫단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화보 촬영을 허락한(?) 잡지들에게도 몇 가지 규제를 두었는데 다른 브랜드의 옷과 섞이면 안 된다는 것. 즉 모델이 아래 위 의상을 전부 로 입어야지, 의 재킷에 디올의 스커트를 입히는 것은 불가다.

다 안 된다고 하면 차라리 잡음이 없을 텐데 보그에는 허락했으니 나머지 잡지들은 뒷목을 잡을 일이다. '아니, 온라인으로 전 세계와 만나는 이런 시대에 이게 무슨 폐쇄적인 태도인가' 불과 얼마 전에 했던 말을 스스로 뒤집는 과정에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어느 쪽이 미래지향적이며 어느 쪽이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일까.

셀린느
내 옷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액세서리나 매니큐어는 안 되고요, 되도록 순수한 느낌의 모델을 쓰도록 제안하고 있습니다. 앵글이 지나치게 왜곡된 화보는 지양하고 옷이 잘 보이는 평이한 콘셉트로 촬영해 주길 부탁드렸습니다."

유니클로의 이번 시즌 야심작은 디자이너 질 샌더와 협업한 '플러스 제이' 라인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디자이너의 손길이 미쳤지만 가격은 유니클로보다 약 30% 높은 수준. 대략 4만~5만원이면 모직으로 만든 바지를 살 수 있다. 그런데 질 샌더가 유니클로와 협업하며 당부한 사항들은 가격처럼 만만치 않다.

잡지사에서 상품을 촬영할 시 한 페이지에 5개 이상은 들어갈 수 없고 (너무 많은 상품을 놓고 찍으면 싸구려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 상품과의 믹스도 물론 안 된다. 그 외에 홍보 담당자가 정중하게 언급한 조건에는 모델의 외모에 대한 부분도 세세하게 포함돼 있다. 부탁을 드렸다고? 그럼 잡지사에서 그 부탁을 거절하면?

"그럼… 촬영은 힘들겠지요."

유니클로의 플러스 제이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패션 잡지와 벌이는 신경전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어떤 브랜드와 함께 나가느냐를 묻는 정도에 그쳤지 그 이상의 간섭은 없었다. 이는 갑과 을의 관계라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국내 굴지의 패션 잡지들이 선보여온 창의적인 비주얼에 대한 믿음. 옷이 어떤 콘셉트에서 어떤 모델에게 입혀졌을 때 가장 아름다울지 누구보다 그쪽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암묵의 신뢰다. 바꿔 말하면 피비 파일로는 패션 잡지와 그밖에 엔터테인먼트 업계 (는 연예인 협찬도 이번 시즌부터 일절 금하고 있다) 모두에게 불신을 선언한 격이다.

'내 옷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이 블라우스에 어울리는 재킷이 뭔지, 그 재킷에 팔을 꿰어 입어야 할지 어깨에 걸쳐야 할지, 누구에게 입혀져 어디로 행차해야 할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옷뿐 아니라 옷이 담기는 장면까지 모두 컨트롤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흡사 서면 인터뷰 외에는 허락하지 않으며 자신의 글에서 토씨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을 것을 인터뷰 수락 조건으로 내거는 대문호를 떠올리게 한다. 나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겠냐고 묻는 듯한 그의 태도에 기자들은 사기가 떨어짐을 느끼면서도 대답할 말은 없다.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 강박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선이 온 세상을 연결하고 깐깐했던 패션 하우스들은 앞다투어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쌓은 브랜드 파워는 홈페이지와 트위터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자주, 더 빨리 알려지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의 폐쇄적인 마케팅은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러브마크의 저자 케빈 로버츠의 말대로 제품의 시대에서 트레이드 마크 시대로, 그 다음 브랜드의 시대로 진화했다면 피비 파일로는 제품의 시대로 회귀한 디자이너다. 가 가진 실적, 명성, 정직성 등 고객들과 쌓아 올린 단단한 추억을 뒤로 하고 오직 옷, 옷, 옷에만 주목하기를 간절히 당부하고 있다.

셀린느 2010 S/S 컬렉션
시대를 역행하는 이 답답이들의 마케팅은 그러나 소통의 본질적 측면에서 본다면 '성의 있는 소통'이다. 소통의 기본은 내 생각을 이해시키고 남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가는 몇 명이 내 말을 들었는가보다 더 중요하다.

소통의 방법이 눈부시게 발달해 지금 당장 지구 반대편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피비 파일로는 매장에 옷을 거는 간격과(옷 걸이 하나에 5벌 이상이 걸리지 않도록) 잡지사 화보 촬영시 스타일리스트와 포토그래퍼까지 지정하는 극성을 부렸다. 그녀는 사실 촬영 현장에 뛰어 들어가 조명 밝기까지 간섭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다른 창작자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큐 편집장 이충걸은 찐득찐득하게 느껴질 만큼 과도한 수사로 써 내려간 그의 책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가 수명이 3개월도 안 될 연애 비법서 옆에 나란히 꽂혀 있는 것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자신의 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가 중 책 표지 디자인에 '올레'를 외친 이는 단언컨대 전체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제대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모든 창작자를 포함해 사람의 간절한 본능이다. 깊이 이해되고 깊이 이해받길 바란다.

이는 창작자의 부지런함이나 강박, 오지랖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피비 파일로와 질 샌더가 에디터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친밀했던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삐치게 만들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실적이다. 는 피비 파일로로 디렉터가 교체된 후 올해 10월 선보인 컬렉션에서 트렌드와 잇백에 중독된 패션계에 클래식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이 플러스는 지난 추석 명동 유니클로 점 오픈 당시 1시간 만에 거의 모든 상품이 품절됐다. 역시 뭐든 잘하고 볼 일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