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키친', '예스, 셰프' TV 속 주방의 살풍경

일러스트: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박찬일 저, 창비
『"야, XX. 파스타 아직도 안 익었어? 이런 젠장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그 썩을 샐러드 아직도 무치고 있는 XX는 당장 그만 두란 말이야. 소스가 모자란다구? 네 심장에서 피를 뽑아서라도 얼른 만들엇, 썅!"

물론 'XX'란 당신이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신체 일부이거나, 그 신체 일부가 침실에서 동작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평화로운 주방이란 내 경험으론 그저 망하기 직전의 어느 식당 말고는 보지 못했다. -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中』

레스토랑의 홀은 쾌적하고 평화롭다. 기대에 찬 눈으로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면서 지인들과 담소를 나눈다. 그들은 당연히 모른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옥처럼 뜨거운 솥 단지를 앞에 두고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 언제 무기로 변할지 모르는 칼을 휘두르며 폭발 직전의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음식은 항상 흥미로운 화두였지만 최근 국내에서는 그 위상이 본질부터 변하고 있다. 이를 눈치 챈 케이블 채널들은 일찌감치 꽃미남들의 레스토랑 창업기나 요리사 서바이벌 같은 프로그램을 편성해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스타일>에서 백마 탄 왕자님의 직업은 잘 나가는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였고, 마지막으로 최근 국내 버라이어티의 최고봉 <무한도전>까지 한식 세계화를 주제로 삼으며 국내 유명 셰프 두 사람을 출연진들의 멘토로 초빙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음식뿐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드는 셰프들의 외모, 화려한 경력에까지 미쳤고 그들의 일터인 주방 역시 전파를 탔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성에 욕설에, 등짝 후려치는 소리까지. 주방의 살풍경은 어느덧 음식 이상으로 흥미로운 소재가 되었다.

고든 램지의 '헬스키친'
온 스타일에서 방영 중인 요리사 서바이벌 <헬스 키친>은 (건강한 주방이 아니라 지옥의 주방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활용했다.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세계 최고 셰프 중 한 명인 고든 램지가 도전자들을 말 그대로 족치는 장면에 달려 있다. 말 귀 못 알아 듣는 도전자에게 "당장 꺼져"는 기본이고 맛본 음식이 별로이면 "여기 앉아서 네가 만든 음식 다 쳐 먹어" 까지.

TV 쇼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실제로 손아래 요리사의 얼굴을 때려 이를 부러뜨리고 축구 선수였던 경력을 살려 엉덩이를 걷어 찬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이를 본 따 만든 버즈 알아랍 호텔 출신 권영민 셰프의 <예스, 쉐프>에서는 좀 더 '친근한' 욕을 들을 수 있다. 우물쭈물하는 도전자들에게 권 셰프는 내장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야, 이 새꺄"라고 외친다. 어떤 말을 듣든 어떤 명령을 받든 그들에게 허용된 대답은 "예스, 셰프" 뿐이다.

"주방장이 말하는 것은 100% 진리다"

뉴욕 한 식당 주방에 붙어 있는 글귀처럼 주방은 군대다. 주방장(셰프)은 사령관이고 그 밑으로 부주방장, 그리고 각 파트 담당자가 있다. TV 쇼에서의 폭언과 폭력은 어디까지나 쇼의 측면이 강하지만 주방의 군대화와 군기는 여전히 전 세계 공통이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단 주방은 바쁘다. 손님의 식탁을 떠난 주문은 주방에 도달하는 순간 명령이 되고 그 순간부터 모든 이들은 손발을 맞추어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을 내야 한다. 어떤 맛있는 음식도 배고픔에 지친 손님을 마냥 기다리게 할 권리는 없고, 또 모든 음식에는 저마다 가장 맛있는 최고의 타이밍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요리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겨 바짝 긴장한 이들 사이로 번쩍이는 칼이 지나 가고 뜨거운 불이 여기 저기서 수시로 올라온다. 광속으로 야채를 써는 중 잠깐 한 눈을 파는 것, 혹은 펄펄 끓는 냄비를 주위 살펴 보지 않고 휙 하고 옮기는 행위만으로도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다.

혹여 누군가 식자재 관리를 소홀히 해 상한 야채가 음식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날로 식당 영업은 끝이다. 사방이 지뢰밭, 손님들은 계속 기다리고 주방은 후텁지근해 불쾌지수를 한껏 끌어 올린다. 이런 상황이라면 질책도 징벌도 빠르고 직설적이다. "당근 대신 손가락을 썰었구나. 다음부턴 잘 하자" 대신 "야, 임마!!!" 소리가 터져 나오고 뒤통수를 사정 없이 후려 맞기 딱이다.

주방을 긴장시키는 것은 칼과 불뿐이 아니다. 정작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평가다. 우리나라보다 조직 문화가 훨씬 덜하고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과 유럽이 주방에서만은 암암리에 폭력을 용인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뉴욕의 레스토랑들은 뉴욕타임스에 매주 하나씩 올라오는 레스토랑 평가에 목을 매고 유럽의 셰프들은 미슐랭이 주는 별 수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이태원 오키친의 오너 셰프 스스무 요나구니는 한 매체의 칼럼을 통해 뉴욕에서 20년 간 요리사로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다.

"주방장의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해요. 주방장들은 자기 이름을 키워야 성공할 수 있거든요. 미슐랭 평가에서 별 하나를 받은 테레스 브레넌이라는 주방장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깜빡 잊고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싸게 했어요."

이쯤 되면 주방의 공포가 그 나라 식문화 수준과 비례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항상 맞는 말은 아니다. 같은 서구권이라 해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국민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좀 덜한 편이에요. 그들은 복종이라는 걸 모르죠. 파시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랄까요. 독일도 과거 전체주의에 대한 뼈저린 반성 때문에 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큰 편이에요. 상대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그런 것들이 허용되는 분위기고 따라서 주방이 살벌하죠."

논현동 누이누이 박찬일 셰프의 말이다. 그는 잡지 기자를 하다가 홀연히 이탈리아로 날아가 시칠리아의 한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한 적이 있다.

"한국은 오히려 옛날에 폭력이 많았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요. 과거에 폭력이 있었던 건 서구처럼 평가에 전전해서라기보다는 일제 시대의 군대 문화 잔재였죠. 중식당이 특히 심했는데 음식 만들던 도구로 사람을 때리는 일도 빈번했어요."

욕하면서 만든 음식 맛은?

군대, 병원, 언론사 등에서 전통적으로 욕설과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쥐고 있는 곳임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미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주방도 점점 미쳐갈 가능성이 크다. 이러다가 미래의 주방은 온통 욕설과 폭력으로 도배되면 어떻게 하냐고?

얼마 전 <무한도전> 한식 세계화 에피소드에서 기획 의도나 제작 과정, 성과를 두고 일어난 소소한 잡음 중 고고하게 빛난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양지훈 셰프다. 청담동 루카 511의 오너 셰프인 그는 10년 넘게 일한 헤드 셰프답게 성의 있는 설명과 꿀 같은 칭찬으로 멤버들을 받쳐 주면서 한편으로 군림했다. 물론 정식 요리사들이 아닌 연예인들의 멘토로서였기 때문에 주방에서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래 사람의 실수는 선배의 잘못이기 때문에 많이 나무라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은 욕설이 음식에 꼭 필요한 양념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한 번 욕을 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거칠어져요"

주방에서 욕 금지를 선언한 줄라이 오세득 셰프의 말이다.

"각자 영역 안에서 책임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수준,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어쩔 수 없이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라도 의식적으로 자제해야죠. 만든 사람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무슨 좋은 요리가 나오겠어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