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를 둘러 싼 검증되지 않은 미신들

세밑의 한 술집, 하얀 얼굴과 빨간 얼굴이 싸우고 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더 나은 거라니까. 하얘지는 건 멀쩡한 게 아니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거라고"

"그래도 빨간 것보다는 하얀 게 낫다니까. 알코올 분해를 못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거라고."

싸울 것 없다. 둘 다 안 좋으니까. 술자리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논쟁. 이제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붉어지는 얼굴과 하얘지는 얼굴

술자리에서 점점 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더 하얘져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시체처럼 창백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안 좋은 상태다. 제일 싼 소주든 몇 달 걸려 만든 고급 술이든, 술에 든 알코올은 체내에 들어가면 무조건 아세트알데히드로 변하는데 이건 독성 물질이다.

몸 속에서 혈관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오르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유난히 잘 빨개지는 사람은 아세트알데히드를 소화하는 능력이 남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다. 한 마디로 독성 물질이 빨리 대사되지 않고 오래오래 몸 속을 누비고 다닌다는 뜻. 얼굴이 하얘지는 것은 확장된 혈관이 갑자기 수축하기 때문인데 이는 심근 경색, 뇌졸중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술 마실 때마다 습관적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도 음주 후 부대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술 마시기 전에는 위장에 기름기를 깔아 두어야 한다?

음주 전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그 지방분이 위벽에 붙어 마치 스폰지처럼 알코올로부터 우리의 위장을 지켜줄 것이라는 상상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텅 빈 속에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알코올 흡수 속도가 느려진다. 문제는 비만의 위험이다.

몸은 알코올로 얻은 열량을 먼저 쓰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움직이고 노래하고 집까지 걸어가도 소비하는 칼로리는 술 칼로리뿐, 돈까스와 모듬 소시지로 얻은 열량은 고스란히 살이 된다. 음주 전 배는 채우되 담백하고 기름기 없는 식사를 하는 것이 제일 좋다. 술의 칼로리가 먼저 소비되는 것을 이용해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안주 하나 없이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는데 살 빼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영양실조를 부르는 최악의 습관이다.

술 깨는 약보다 물이 낫다?

모든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음주 도중과 후에 물을 많이 마시라는 것. 술 마시는 속도를 줄여주는 데다가 좀 더 빨리 술에서 깰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음날 숙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등… 잠깐, 이건 시중에 나와 있는 숙취 해소 음료의 역할 아닌가?

숙취의 원인은 아세트 알데히드와 수분 부족, 미네랄 부족이다. 물은 이 중 두 번째 원인을 해소함으로써 숙취를 가라앉혀 준다. 숙취 해소 음료를 약이 아닌 꿀물이나 식혜의 의미로 받아 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분이 물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술에서 깨어나는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여준다거나 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숙취 해소 능력이 뛰어나다고 믿는다면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것이다.

만취할 때까지 마신 양이 주량이다?

사실 주량이라는 말은 그 정의가 모호하다. 허용선인지 아니면 한계치인지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뜻이 혼선되는 경우다. '소주 3병이 나의 주량(한계치)이기 때문에 주량(허용선)까지 마시는 것은 괜찮다'라는 궤변이 탄생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술이 정수리까지 오른 사람들이 연말 길바닥을 장식하게 된다. 의사들은 주량 대신 적정 음주량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취할 때까지가 아니라 취기가 느껴지는 시점까지만 마시라는 것. 권장량은 성인 남자 소주 4~5잔, 여자는 2잔 정도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취기를 즐기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양이다.

폭탄주는 사실 순한 술이다?

폭탄주는 그 과격한 이름과는 달리 도수가 높다거나 목구멍이 타 들어갈 만큼 강한 맛을 내는 술은 아니다. 소주보다 맛있고 맥주보다 심심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의 훌륭한 발명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폭탄주는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무서운 술이다. 도수가 높은 소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 폭탄주이기 때문이다.

폭탄주의 도수는 보통 10도에서 14도 정도. 맥주에 섞여 들어간 소주는 특유의 쓴 맛을 버리고 밋밋한 맥주에 액센트를 주는 역할로 바뀐다. 때문에 소주만 따로 마신다면 1병도 못 마실 사람도 폭탄주로 만들어 마신다면 2~3병까지도 마실 수 있게 된다. 제대로 섞인 폭탄주는 맛도 좋아 술술 들어가고 설상가상으로 맥주의 탄산은 체내 흡수를 촉진시킨다. 만일 폭탄주 2잔을 연달아 들이켰다면 소주 3분의 2병을 한 번에 마신 셈. 오직 취하기 위해 마시는 후진적 술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 폭탄주다.

한 번 끊기기 시작한 필름은 치매의 징조?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난다. 내 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뇌에는 해마라는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이 있는데 알코올이 이 해마를 고장 내는 바람에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아예 입력이 안 된 것이다. 입력되지 않았으니 출력될 것도 없다. 필름이 끊겨도 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과거에 입력된 데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필름 끊김 현상(블랙 아웃)은 한 번 일어나면 그 후로도 계속,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특징이 있는데 여러 번 반복되면 뇌의 인지 기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해마뿐 아니라 다른 뇌의 기능도 억제된다. 이는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블랙 아웃이 곧 치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최근 6개월 동안 두 번 이상 블랙 아웃 현상을 경험했다면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조언한다. 당신의 뇌가 술 때문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