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림, 다미르 도마 등 톱 디자이너를 위한 6가지 향수
간단한 만큼 또 손쉽게 영혼이 복제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를 주제로 향을 제조하고 그 향을 쓰고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라. 차라리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를 빼앗기는 편이 낫다.
소설 <향수>에서는 사람에게서 향을 채취하는 과정을 살인과 연결시켜 섬뜩하게 묘사했다. 가장 좋은 순간의 향을 얻기 위해 죽인다는 설정이지만 책을 덮고 난 후에 남는 것은 냄새를 빼앗기는 순간 존재도 사라진다는 메시지다. 그르누이 같은 천재 조향사가 나를 위한 향수를 만든다면 제일 먼저 어떤 것부터 시작할까? 둔기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 말고 말이다.
조향사들이 사람을 주제로 향수를 만들 때는 퍼퓸 프로파일링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프로파일링은 자료 수집이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범죄심리학이라는 협의로 더 많이 쓰인다. 범죄 현장을 둘러 보고 범인의 성별, 성격, 나이, 심지어 얼굴 생김새까지 추측하는 과학수사기법 중 하나인데 향수를 제조할 때도 이에 못지 않은 자료 수집이 선행된다.
첫째는 외모, 눈꼬리가 올라갔는지 한없이 처졌는지, 머리는 늘어뜨리는지 바짝 묶어 올리는지. 그 다음은 성격이다. 실실 웃고 다니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인지, 늘 인상을 쓰지만 정작 남의 부탁에 약한 타입인지. 이 밖에도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투를 쓰는지, 어떤 가구로 방을 어떻게 꾸미는지, 어떤 음악을 듣고, 남자 친구는 어떤 타입인지 등 세세한 것들까지 고려 대상이 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이 맡은 팜므파탈 미실을 예로 들어보자. 일단 경국지색답게 섹시함과 원숙미를 표현할 수 있는 오리엔탈 계열의 향이 바탕에 깔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 페퍼나 로즈의 톡 쏘는 향은 녹록지 않은 그녀의 첫 인상을, 지적이고 세련된 모습은 시프레 계열이 표현해줄 것이다.
여기서 끝내면 막장 드라마의 며느리는 돼도 국민의 40%를 설득시킬 만한 카리스마 군주는 못 된다. 따스한 바닐라나 살 냄새 물씬 풍기는 머스크 향으로부터 문득문득 드러나는 의외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져 온다면 비로소 미실의 영혼을 입체적으로 반영한 향이 완성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냄새는?
뉴욕의 유명 편집숍 세븐은 정기적으로 유서 깊은 향수 제조업체인 기보당과 '식스 센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얼마 전 두 번째 프로젝트에서는 세계 각국의 촉망 받는 디자이너들을 주제로 향수를 제조했다. 이른바 6명의 창의적인 디자이너들과 그들을 닮은 6개의 매력적인 향수다.
은 뉴욕을 중심으로 뜨고 있는 신진 실용주의 디자이너의 대표주자다. 베이지, 골드, 화이트 등 단순한 색깔만으로도 때론 마크 제이콥스보다 재기 넘치고 페라가모 못지 않게 격식을 차릴 줄 안다. 조향사 나탈리 그라시아세토가 그를 위해 제작한 향수 '콜라주'는 표현하자면 수돗물 같다. 처음 분사했을 때는 강한 후추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이내 시트러스 계열로 바뀌는 향은 사무적이고 경쾌하다. 추운 아침 뉴욕의 출근 길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향수는 로맨틱하면서도 무심한 의 옷 그 자체다.
"의 옷은 회사에 일하러 갈 때도 입을 수 있고 저녁에 외출할 때도 충분히 스타일리시하죠. 낮과 밤 언제나 어울릴 신선하면서도 관능적인 향입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젊은 디자이너 다미르 도마에게서 조향사 얀 베스니에가 주목한 것은 패션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각이었다. '엔드/비기닝'의 짙은 삼나무 냄새는 무채색만 사용하는 그의 옷에 비해 훨씬 축축하고 원시적인 느낌이지만, 천을 겹치고 늘어뜨려 재질을 강조하기 좋아하는 도마의 주관과 일맥상통한다.
"오로지 천연 재료만을 사용해 얇고 투명한 소재가 겹쳐지는 듯한 느낌의 향수를 제조했습니다."
펑키한 그래픽 티셔츠로 유명한 하우스 오브 홀랜드의 디자이너 헨리 홀랜드는 평소 밝은 성격답게 사람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큰 사이즈의 보라색 소파 같은 향수를 원했다. 스테판 닐슨은 디자이너 머리 속의 개인적이고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첫 향은 지독하게 달콤하면서 점점 시끌벅적하고 캐주얼하게 변하는 향수 '스멜'을 만들었다. 라일락과 재스민 향을 사용했으며 여기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부드러운 머스크 향이 더해졌다.
영국 디자이너 리차드 니콜은 식물원에 들어선 것 같은 짙은 회향 냄새로 다시 태어났다. 복잡하게 섞인 느낌 없이 단순하면서도 찌르는 듯이 강한 허브 향은 미니멀한 조형미를 즐기는 그의 취향을 반영한다. 아삭한 야채 줄기, 뿌리에 묻은 흙, 흩뿌려진 꽃잎의 향을 위해 조향사 루스는 펜넬과 바질 등 허브를 다채롭게 사용했다.
"단순하고 건전함의 이면에 복잡함을 감추고 있듯 '니콜 17'은 자연스럽고 신선해 어디에나 어울리는 단순함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아시아 디자이너인 토가의 야수코 푸루타는 기억 속에 인상 깊게 자리 잡았던 호박빛의 사각 위스키 병에 대해 조향사와 논의했다. 매끄러운 표면의 두꺼운 크리스털 병과 그 안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캐러멜 빛 위스키는 강렬한 패출리 향을 가진 '위스키 캬라멜리제'로 탄생했다. 온통 달달한 첫 향에 이어지는 꽃과 과일, 머스크 향이 미각을 자극한다.
도움말: 에뛰드 에스쁘아 권소영 과장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