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의 주방] (1) 오스트리아산지 영향 고기와 허브 발달… 소박하고 푸짐한 상차림

허브로 양념해 훈제중인 돼지고기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어센틱 키친(authentic kitchen)'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름대로 뿌리 있는 우리네 입맛에 의해 타국의 음식들은 어쩔 수 없이 변형되고 조율을 거쳤다.

퓨전과 현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발전이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그 나라의 진짜 맛은 뭘까. 단 1%의 현지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타국의 주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식당들이 이제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욱한 훈제 향이 주방을 꽉 메운다. 각종 허브를 꾹꾹 눌러 재운 돼지 고기가 훈연 속에서 숙성되는 중이다. 옆에는 발효 햄의 일종인 살라미가 줄줄이 걸려 있다. 이건 차가운 기온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숙성되는 중이다.

오스트리아는 고기의 나라다. 튀긴 고기, 구운 고기, 훈제한 고기 천지에,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음식은 빵과 포도주, 치즈뿐이니 오스트리아에 장기 체류할 작정이라면 채식주의는 포기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돼지 고기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 국토의 3분의 2가 동 알프스 산맥에 걸쳐 있는 이 나라에서는 기온이 떨어져 사람의 체취가 줄어드는 가을, 겨울이 되면 본격적으로 사냥꾼들이 움직인다.

비엔 슈니첼과 유르취치 그뤼베 와인
눈 덮인 산자락에서 포획한 사슴과 멧돼지는 닭, 양, 돼지, 소와 함께 삶거나 튀겨져 메인 디쉬로 오르고 그 옆에는 익힌 감자와 푹 절인 양배추, 시금치 등이 풍부하게 곁들여 진다. 산에서 얻는 것은 고기뿐이 아니다. 사실 오스트리아 식탁 위에 오르는 모든 음식은 산으로부터 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산에서 채취하는 야생 허브는 고기 요리에 풍미를 더하고 베리 류로는 잼을 만들어 먹는다. 사방에 널린 야생 버섯 덕에 버섯 요리도 크게 발달했다.

풍성하고 소박한 오스트리안 주방

빈 소년 합창단,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음악의 도시 등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익숙한 단어들에도 불구하고 음식만은 이상하리만치 우리에게 생소하다. 독일, 헝가리, 체코 등 8개나 되는 인접 국가들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음식은 더운 요리가 많고 소박하며 항상 넘칠 듯이 푸짐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한국에서 정통 오스트리아 음식을 내는 곳은 딱 한 군데, 이태원의 쉐프 마일리다. 힐튼 호텔에서 총 주방장을 하다가 3년 전 식당을 연 크리스찬 마일링거 씨는 자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엔 슈니첼을 추천했다. 동로마 제국 시대부터 먹어 온 이 유서 깊은 음식은 돼지 엉덩이 살을 두드려 편 후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묻혀 튀겨낸 것이다.

발효햄의 일종인 살라미
돈까스라고 이해하면 쉽겠지만 현지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다. 일단 그들 말로는 돈까스의 빡빡한 등심과 달리 엉덩이 살을 쓰기 때문에 씹는 느낌이 훨씬 부드럽고 빵가루도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속설에 따르면 원래 제대로 된 비엔 슈니첼은 변기 뚜껑만 해야 하며 한 접시를 가지고 나눠 먹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한다.

물론 얼핏 보기에도 돈까스와는 다르다. 일단 그 광활한 고기 튀김 위에 소스 한 방울 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 그렇다. 대신 레몬즙을 살짝 뿌린 뒤 함께 나오는 크랜베리 잼을 올려 먹는다. 한국에는 냉동 제품밖에 없어 부득이하게 알프스 산지에서 나는 야생 크랜베리를 공수해 만든 잼은 고기 튀김과는 잘 안 어울릴 거라는 예상을 깨고 훌륭하게 어우러질 뿐 아니라 심지어 소스가 없어 목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까지 한다.

고기와 크랜베리를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일등공신은 아무래도 고기 속 깊이 배인 허브 향인 듯 하다. 마조람, 로즈마리, 타임 등 익숙한 허브는 물론이고 카라웨이의 씨처럼 국내에서는 빵을 구울 때나 가끔 쓰이는 재료로도 고기를 재우는데 이 타국의 생소한 허브 향은 곧 오스트리아 주방의 냄새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허브 역시 모두 현지에서 사가지고 온다. 한국 수입재료상에서 파는 것들은 너무 오래 돼 장작처럼 부서지고 향이 없다는 것이 마일링거의 평이다.

쉐프 마일리의 2층은 레스토랑이고 1층은 식료품점인데 그곳에는 최소 보름에서 길게는 몇 달씩 매달아 말린 햄과 소시지가 가득하다. 오스트리아 곳곳에는 이런 식의 소시지 가게가 아주 흔할 뿐 아니라 시내 전차 환승역을 비롯한 전략적 교통 중심지를 점하고 있을 만큼 수요가 높다.

인접한 독일의 영향이 크지만 그렇다고 독일 소시지라고 불렀다가는 발끈할 수 있다. 요즘에는 이렇게 가게 고유의 색을 담은 소시지 가게가 점점 줄어들고 대량화ㆍ공업화 돼 가는 추세다. 소시지에 감자, 사우어 크라우트(절인 양배추)를 곁들이면 가장 기본적이고 간소한 형태의 오스트리안 식사가 된다.

자허 토르테
메인 음식을 먹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이트 와인이다. 오스트리아 음식을 독일과 구분시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맥주보다 화이트 와인을 더 즐긴다는 것이다. 와인에 눈 뜬 지 얼마 안 된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최근엔 칠레 와인 정도가 유명하지만 사실 오스트리아는 제법 내실 있는 와인 수출국이다. 전체 포도주의 80% 이상이 백포도주에 편중돼 있으며 그 중 가장 최근에 수확한 햇포도로 담근 호이리게가 최고 인기다.

국내에서 오스트리아 와인을 수입하는 업체는 딱 한 곳으로 쉐프 마일리도 이곳에서 와인을 들여오는데 시음을 원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은 현지에서 제일 유명한 와인인 유르취지 그뤼베다. 오스트리아인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맥주처럼 편안하게 와인을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고기 요리 외에 제과제빵도 상당히 발달했다. 각 도시마다 어디나 콘디토라이라고 불리는 제과점이 있어 딸기를 얹은 비스킷이나 케이크, 초콜릿을 씌운 길다란 과자, 버터가 든 빵, 크로아상, 작은 과자들을 구워 판다.

이 중 가장 많이 먹는 디저트는 . 메테르니히 공의 요리사였던 자허가 고안한 것으로,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에 살구잼을 바른 뒤 그 위에 또 초콜릿을 코팅해 차게 굳힌 달디 단 케이크다. 설탕에 졸인 살구와 아몬드를 넣어 만든 린처 토르테도 유명하고 사과, 야채, 치즈 중 아무거나 넣고 돌돌 말아 구운 롤 파이 슈트루델도 대표적인 디저트다. 사과 슈트루델과 감자를 듬뿍 넣은 수프는 그대로 한끼 식사가 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에 가면 살이 찐다?

푸짐한 고기 요리의 향연에 이어지는 각종 달디 단 디저트들. 이로 인해 타국인들 사이에서는 "당신이 도착했을 때와 같은 몸매로 오스트리아를 떠난다면 그건 큰 성공이다"라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 유시민 전 장관은 그의 저서 <유럽문화이야기>를 통해 높은 콜레스테롤과 칼로리로 오스트리아 인들은 식사 때마다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물론 당사자들은 절대적으로 부인한다.

자국의 음식은 결코 기름지지 않고 달지도 않으며 오스트리아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 뚱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물론 양쪽 다 상대적인 기준이다. 크리스찬 마일링거 씨의 눈에는 한국 사람들은 도무지 단 것을 즐기지 않으며 그 증거로 케이크라고 해 봤자 내부가 빵으로 가득 찬 스폰지 케이크만 먹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리 쪽에서 봤을 때는 치아 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달아 입도 대지 못하는 케이크나 튀긴 에멘탈 치즈, 버터를 둘러 굽는 돼지 고기 같은 음식을 매일 먹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눈에 한국인은 너무 말랐고 그들이 적당하다고 여기는 풍채는 우리 눈엔 군살로 비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오스트리아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어떤 음식이 나올까? 투박하고 푸짐한 비엔 슈니첼을 이 나라의 대표 가정식이라고 친다면 말이다. 놀랍게도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음식 역시 비엔 슈니첼이다. 다만 고기만 돼지 고기에서 최고급인 송아지 고기로 바뀐다. 오뜨 뀌진과 가정식이 완전히 분리된 프랑스와는 달리 집에서나 레스토랑에서나 대를 물린 전통 요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라니, 이 또한 오스트리아의 유서 깊고 소박한 식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참고서적: <오스트리아(큐리어스)>, 수잔 로라프, 휘슬러
<오스트리아>, 레바캉스
<유시민과 함께 읽는 유럽문화이야기>, 유시민, 푸른나무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