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세게적 디자이너… 한국 곳곳에 남아 잇는 그의 흔적들

99 SS 컬렉션
알렉산더 맥퀸은 칼 라거펠트나 이브생로랑과 달리 국내에서 그다지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한 차례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나 사실 맥퀸은 몇 번이고 이 땅을 밟았다. 그 증거로 한국 곳곳에는 맥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대문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웨어러블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를 알고 싶다면? 동대문으로 가면 된다. 패션의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카피캣 시장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해, 데뷔한 지 두 시즌도 채 지나지 않은 신진 디자이너들도 일상에서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옷만 만든다면 당장 컬렉션 다음날이라도 동대문과 온라인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 전위적이고 숨막히는 비주얼을 사랑해온 디자이너는 응당 카피 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장을 머리에 씌우고 30cm 힐을 만드는 디자이너의 작품을 누가 따라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번 그의 작품이 국내 보세 시장을 휩쓴 적이 있는데 해골 프린트가 바로 그것이다. 헐리웃 스타들의 파파라치 사진에서 시작된 해골 무늬 스카프와 카디건은 국내의 패셔니스타들이 그대로 받아 전수하면서 급속하게 대중으로 퍼졌다. 고딕룩이나 록 시크에 단골로 등장하는 해골은 그 틀에 박힌 이미지를 벗어나 소녀풍의 로맨틱한 블라우스에, 또는 똑 떨어지는 커리어 우먼의 재킷에 식상함을 덜어주고 장난끼를 더하는 소품으로 활용되면서 출시된 지 5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랑 받고 있다.

지난 해 말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모델이 파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20세의 젊다 못해 어린 김다울 양은 샤넬, 드리스 반 노튼, 그리고 알렉산더 맥퀸의 런웨이에 서는 모델 중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했다. 09 S/S 맥퀸의 쇼에서 김다울은 흐트러진 머리 그대로를 망으로 고정시킨 채 특유의 텅 빈 얼굴로 장어 꼬리뼈 같은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걸었다.

맥퀸의 죽음을 두고 우울증에 대한 조심스러운 추측이 나오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는 최근 들어 사망 소식이 많았다. 맥퀸이 뜨기 전 처음으로 그의 재능을 발견해 준 이사벨 블로우가 2007년 음독 자살한 데 이어 그의 어머니도 며칠 전 세상을 떠 그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맥퀸의 작품을 눈 여겨 본 이라면 그의 주변에서 진동한 죽음의 냄새가 꼭 요즘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제된 새, 멈춰버린 회전 목마, 뼈 같은 오브제는 그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것들로, 그는 종종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머리를 랩으로 칭칭 감고 오버 립 메이크업으로 입을 틀어막다시피 해 긱 시크(geek chic)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캐리어 가방 전문 회사 에서는 여행 가방 위에 사람의 갈빗대를 선명하게 양각으로 조각해 끔찍하면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그만의 시그너처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멀티 아티스트 김기라

국내뿐 아니라 영국, 스위스, 뉴욕, 일본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김기라 작가는 전공이 따로 없다. 평면 회화부터 시작해 조각, 영상, 설치 등 거의 모든 예술 분야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해가며 그가 표현하고 싶어한 것은 권력에 대한 소시민적 못마땅함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불러온 폭력과 정크 푸드, 그 속에서 짓눌린 개인을 그리되 무겁지 않게, 예를 들어 히틀러의 눈에 주먹을 한 방 날려 멍든 눈으로 찡그리고 있는 초상은 그의 작품 세계를 대변한다. 김기라의 전시 '슈퍼 메가 팩토리'의 작품들은 지난 해 10월 영국 프리즈아트페어에 출품돼 몽땅 팔리는 쾌거를 거두었는데 그 중 '거대 권력에 희생 당한 피노키오' 조각을 사간 이가 바로 맥퀸이다.

그는 패션 말고도 그를 둘러 싼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맥퀸을 패션계의 악동, 영국 패션의 훌리건으로 불리게 만든 것은 그만의 독특한 무대 연출이었다.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다, 내일도 걷겠지'라는 우스개가 나올 만큼 그저 걷는 것이 전부인 패션쇼의 개념을 맥퀸은 완전히 전복시켰는데 99년 S/S 컬렉션에서 그로 인해 전 세계가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정갈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델에게 두 대의 기계가 미친 듯이 노란색과 검은색의 페인트를 분사해 엉망으로 더럽혀(?) 놓은 것. 테러를 당한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델의 표정과 동작, 무규칙적으로 형성된 프린트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아름다워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몇 번이고 패러디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파격적인 무대 장치를 줄이고 옷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그가 한번 뒤집어 놓은 패션쇼의 개념은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머리 한구석에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신정아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골로 맥퀸의 존재를 알았다면 대한민국 아줌마들에게 맥퀸이 알려진 계기는 지난 2007년 일어났던 일명 신정아 스캔들이다. 허언증에 걸린 이 신데렐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자 그녀가 신고 입고 타고 거주하는 모든 것들이 단박에 화제에 올랐다. 그 중 야구 모자와 함께 가볍게 걸친 삐에로 티셔츠가 알렉산더 맥퀸의 것임이 알려지면서 티셔츠 쪼가리가 20만원이나 한다는 질타와 함께 매장에 재고가 남았냐는 문의가 동시에 쇄도했다.

두 명의 삐에로가 서로 반대쪽을 보고 있고 분홍색 바이어스로 목둘레를 마감한 이 티셔츠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녀가 삐에로의 이중적 의미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한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신이 빠진 와중에 아무거나 집어 입었다는 설이 더 정확할 듯 하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온스타일의 신진 디자이너 발굴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는 최근 시즌 2를 방영하며 요상한 징크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즌 1에서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스쿨의 최연소 입학자로 주목을 받은 계한희 씨가 처음으로 탈락한 데 이어 시즌 2에서도 같은 학교를 졸업한 이현식 씨가 최초 탈락자가 되고 만 것. 본의 아니게 먼 타국에서 불명예를 얻게 된 세인트 마틴 스쿨은 파슨스, FIT 등과 함께 세계적인 디자인 명문인 동시에 맥퀸의 모교다. 그는 실무에서 경험을 쌓다가 20대 중반에 늦깎이로 입학했는데 포트폴리오가 워낙 좋아 학부 과정은 패스하고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우연찮게도 시즌 1의 우승자인 이우경 씨의 마지막 컬렉션에서 일어났던 표절 시비 역시 맥퀸과연관되어 있다. 의상이 아닌 메이크업에 관한 것이었는데 모델의 입술을 두 배 정도로 부풀려 검게 칠한 모습이 맥퀸의 09 F/W 컬렉션의 그것과 비슷해, 당시 인터넷 상에서는 그를 두고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갑론을박이 한동안 이어졌다.


샘소나이트와의 합작
모델 김다울

황수현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