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디자이너 6인 알린 '컨셉트 코리아'… 패션 한류에 공식 기틀 마련

'뉴욕은 한국을 좋아해?'

지난 해 2월 뉴욕의 모마 미술관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전 세계를 돌며 신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공모하는 '데스티네이션 프로젝트'의 6번째 도시로 서울이 지목된 것. 숟가락 한 가운데를 뚫어 만든 병따개(세컨드 호텔)는 우리가 휴대 전화만 만들 줄 아는 민족이 아님을 보여줬다.

오는 3월에는 뉴욕 첼시 라베뉴에서 '코리안 아트쇼'가 열린다. 무려 100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한국의 미술을 알릴 예정이다.

새롭고 신선한 타국의 문화에 대한 갈망은 만국 공통이라고 하지만 뉴욕은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태생을 묻지 않고 핫(hot)하고 힙(hip)한 모든 것에 "어썸(awesome)!"을 외칠 준비가 돼 있는 이 관대한 도시는 문화ㆍ예술 전반에서 글로벌 화의 시동을 걸고 있는 한국의 첫 번째 공략 장소다.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컨셉트 코리아'
한국의 음식, 한국의 음악, 한국의 미술 등 줄을 선 후보는 많지만 2010년은 패션 차례다. 세계 최대 온라인 패션 사이트 스타일닷컴이 뽑은 2010년 F/W의 스무 가지 키워드 중 하나는 'Seoul train'이다. 뉴욕에 진출한 한국 브랜드 에린 브리니에, 패션위크 기간 동안 쇼를 연 디자이너 박춘무, 정구호와 함께 '컨셉트 코리아' 전시회가 언급됐다.

한국 패션의 '공식' 뉴욕 진출?

지난 2월12일부터 14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컨셉트 코리아는 '맨 땅에 헤딩'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한국 패션의 해외 진출에 정부가 전략적으로 개입한 첫 사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주관으로 뉴욕패션위크 기간에 맞춰 한국 디자이너 6인의 작품을 전시한 이 행사는 전략적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다른 그림을 보여줬다.

한바탕 폭설이 지나간 2월12일 밤, 뉴욕패션위크가 한창 진행 중인 브라이언트파크 바로 옆에 위치한 퍼블릭 라이브러리에서는 컨셉트 코리아의 오프닝 파티가 열렸다. 뉴욕 패션계의 거물인 (뉴욕패션협회회장)가 단상에 올라 한국 패션의 뉴욕 진출을 축하하는 환영사를 발표했고 디자이너 두리 정, 타쿤, 미술가 척 클로스, 영화 배우 키아누 리브스 등이 식장에 모습을 보였다.

"는 뉴욕 패션계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가 한국 디자이너들에 대해 발언했다는 것, 뉴욕패션협회와의 소통 창구를 만드는 일은 디자이너 개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임에는 틀림이 없죠."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디자이너 6인 중 일찌감치 혈혈단신으로 뉴욕 패션계의 문을 두드려 온 앤디앤뎁 김석원 디자이너의 말이다. 뉴욕 타임즈, 파이낸셜 뉴스, 우먼즈 웨어 데일리 등 현지 주력 언론의 조명을 받는 일에도 성공했다.

뉴욕 타임즈의 티 매거진은 '한국의 마크 제이콥스는 누구인가?'라는 타이틀로 사전 보도를 했고 파이낸셜 뉴스는 앤디앤뎁의 '날아갈 듯이 가벼운 파티 드레스'와 '불교 수도승들의 옷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호의 옷에 대해 언급했다. 총 650여명이 몰린 파티는 떠들썩했고 스타 셰프가 만든 퓨전 한식과 막걸리, 그리고 가수 비의 축하 공연으로 한국 문화는 당장이라도 날개를 펴고 뉴욕 중심부에 내려 앉을 것 같았다.

물론 전부 좋지만은 않았다. 좀 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시도했던 작가들과의 협업(로즈마리 트로켈, 잭 피어슨 등의 영상과 사진)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집중되어야 할 관심을 다소 분산시켰다는 평이 있었다.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은 의도는 좋았지만 옷이 묻혀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어요. 비주얼을 좀 더 풍성하게 하고 싶었다면 IT업체와 협업해 3D 패션쇼를 기획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표현 방식은 다양하게 하되 좀더 패션에 집중하는 거죠." 파리 컬렉션에 이어 뉴욕에서는 처음으로 준지(juun.j)를 전시한 정욱준 디자이너의 말이다.

전시 위치 등에 있어서 디자이너들에게 균등하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도 나왔다. 최근 뉴욕패션협회의 이사로 선임된 제일모직 이서현 전무, 구호의 뉴욕 컬렉션 데뷔, 그리고 컨셉트 코리아의 반대 급부로 이루어질 미국 디자이너들의 꼬르소꼬모(제일모직이 운영하는 패션 편집숍) 진출 등 연관성 깊은 일련의 사실들에 줄을 긋다 보면 뉴욕의 패션 거물을 이끌어낸 한국의 큰 손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Andy&debb
편파 논란의 진원지이기도 한 이 대기업의 자본은, 그러나 한 나라의 패션을 알리는데 필수적 요소라는 데 대부분 공감하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컨셉트 코리아가 거둔 뜻밖의 수확은 '세계로 나가는 한국의 패션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라는 고민에 대해 자연스러운 해결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제 옷에 한국적인 요소를 집어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안 그래도 서양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낯설어요. 파리에서 5년간 매장을 운영하면서 고객 중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다 제가 동양에서 온 디자이너인 걸 알더라구요. 물론 한국인이냐고 묻지는 않고 일본인이냐고 묻죠."

"6명 모두 자기만의 색깔이 확고한 디자이너들입니다. 굳이 조각보나 한복을 모티브로 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곧 한국의 패션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 박춘무와 김석원의 말처럼 '코리안 시크(Korean chic)'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려줄 주체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을 지도 모른다.

Juun.J
요즘 뉴욕은 4대 패션 도시라는 사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파리나 밀라노에 비해 역사가 짧고 실험성은 부족한 반면 실용적이면서 판매 지향적인 특징 때문에 세계 최대의 패션 비즈니스 장으로 무섭게 성장 중이다.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전 세계 바이어들이 모여드는 뉴욕의 패션 시장 규모는 유럽의 7배에 달한다는 통계 자료도 있다.

최근 데뷔 전을 치른 컨셉트 코리아는 하드웨어(핫한 장소와 최고의 현지 파트너, 그를 가능케 한 자본)와 소프트웨어(세계 무대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춘 디자이너들)가 적절히 만나 이루어진 최초의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획총괄을 맡은 제일기획 김형욱 차장은 향후 첫 회의 미흡함을 보완하고 비즈니스 적 측면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는 처음이라 한국 디자이너들을 알리는 데 집중했지만 다음부터는 좀더 실질적인 바이어들과의 수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미 현지에서는 컨셉트 코리아를 하나의 브랜드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뉴욕으로 간 디자이너 6인방의 컬렉션 & 미니 인터뷰

1. 컨셉트를 설명해달라

DEMOO
2. 해외에서는 당신의 작품 어디에서 한국적 미를 발견하나

3. 앞으로의 해외 사업 계획은?

김석원과 윤원정

한국에서 보기 드문 부부 디자이너, 김석원과 윤원정은 뉴욕의 프랫아트스쿨에서 패션을 전공하고 99년 한국에서 브랜드를 론칭한 뒤 10주년이 되자 바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번 컬렉션으로 뉴욕에서의 네 번째 쇼를 무사히 마친 이들은 그들 특유의 로맨틱 미니멀리즘으로 유럽, 중동 지역으로 저변을 넓혀가는 중이다.

1. 지금까지 중 가장 젊고 섹시한 컬렉션이었다. 현지인들의 취향에 맞춰 앤디앤뎁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 넘치고 자립심이 강하며 섹시한 여성들을 롤 모델로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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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베나 패치 워크 같은 소재, 그리고 프린트에서 보이는 수묵화적 기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을 느낀다. 이번 시즌에는 국내 판화 작가의 은행나무 프린트를 사용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3. 여러 편집숍을 비롯해 지난 시즌부터는 미국 최고급 백화점 니만 마커스의 온라인 몰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유럽과 중동 지역의 바이어들도 몰리기 때문에 기회가 많다. 현재 레바논의 부유층들을 위한 숍에 입점돼 있고 최근 컬렉션에는 이탈리아 쪽에서도 관심을 보여 왔다.

정욱준

국내에서는 론 커스텀, 해외에서는 준지로 활동중인 이 동안의 디자이너는 일찍이 해외로 눈을 돌려 파리에서 데뷔, 현재 뉴욕, 파리, 밀라노, 홍콩 등 전세계 유명 편집숍에서 자신의 옷을 팔고 있다. 탄탄한 테일러링 실력을 바탕으로 한 트렌치 코트의 변형으로 현지 패션계의 인정을 받았다.

1. 컬렉션 명은 '히든(hidden)'이다. 겉보기엔 클래식한 코트지만 지퍼를 열면 그 안에 숨겨진 밀리터리 풍의 디테일이 드러난다. 클래식을 변주하는 내 작품 세계의 연장이라고 보면 된다.

doii paris
2. 완벽한 테일러링을 가능케 하는 섬세한 손맛이다. 그 밖에 모든 작업이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다는 점, 그리고 선에서 묻어나는 부드러운 느낌이 한국적이라고 하더라.

3. 지난 1월에 파리에서 전시를 마쳤다. 앞으로도 옷을 보여주는 것은 파리에서 하되 뉴욕에서는 컨셉트 코리아 같은 전시나 쇼룸을 통해 좀더 비즈니스 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박춘무

89년 론칭 이래로 블랙과 절제된 라인, 강한 캐릭터라는 오리지널리티를 고집하며 마니아 층을 이끌어온 디자이너 박춘무는 이번에도 무채색에 강렬한 원색을 섞은 컬렉션으로 뉴욕에서 쇼를 열었다. 그녀의 해외 진출은 파리에 이은 두 번째로 컨셉트 코리아 전시에서는 쇼와는 다른 그래픽 패턴의 옷을 보여줬다.

1. 경계선을 주제로 작업했다. 안과 밖, 빛과 어둠,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린 미래지향적인 옷이다. 블랙을 메인 컬러로 블루 포인트를 주었고 실루엣 역시 평평함과 볼륨의 경계선을 오간다.

hexa by kuho
2. 꼭 집어 한국이라기 보다는 동양적 느낌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한다. 요즘 뉴욕에는 중국을 비롯해 아시안 패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기 때문에 동양인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3. 앞으로도 뉴욕 쪽으로 계속 문을 두드릴 계획이다. 뉴욕의 현대적이고 모던한 느낌이 데무와 잘 맞는 것 같다.

홍승완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정통 복식에 작가적 창의성을 가미하는 디자이너 홍승완은 스위트 리벤지로 오랫동안 국내 시장에만 전념하다가 지난해 처음으로 해외 진출을 노리고 로리엣을 론칭했다. 잘 만든 비스포크 수트에 팔꿈치만 다른 천으로 대는 식으로 위트를 더한 로리엣은 현재 일본의 편집숍에서 판매되고 있다.

1. 특별한 컨셉트가 있기 보다는 전통적인 테일러링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캐주얼 라인에는 전원에서 영감을 받은 내추럴리즘으로 자연친화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2. 한국인이 만드는 서양 복식에는 필연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절개 부분을 곡선으로 처리하는 등의 방법으로 한국적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

3. 로리엣이 일본 다음으로 생각하는 시장은 뉴욕이다. 뉴욕은 거의 200년이 된 도시로 현대 패션과 근대의 클래식함이 공존하고 있어 로리엣이 추구하는 전통과 현재의 공존이라는 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도이

국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이미 중동, 미국, 아시아 등지에 진출한 디자이너 이도이는 매번 풍성한 색감과 화려한 프린트로 여성스러운 감성을 보여준다. 이번 뉴욕에서의 전시를 마친 뒤 바로 런던으로 날아가 패션위크기간 동안 쇼를 열었다.

1. 러시아 동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매 컬렉션마다 스토리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따라 일러스트를 그리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동화에서 본 화려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프린트를 옷에 넣어 보았다.

2. 서양에서는 내 옷을 두고 항상 동양적이라고 말한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만든 옷이 곧 한국적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3. 뉴욕에도 관심이 많고 이미 여러 지역에서 도이 파리스가 판매되고 있지만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런던이다. 스토리를 생각하고 일러스트를 그리는 창조적인 과정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곳이다. 앞으로도 계속 런던패션위크에 참가할 계획이다.

정구호

(사정상 인터뷰가 불가능해 컨셉트 설명으로 대신함)

주류 패션계에서는 드물게 아방가르드 컨셉트를 꾸준히 고수해온 정구호는 예의 그 무채식과 축축 늘어지는 드레이프, 극단적인 볼륨과 중성적인 미를 살린 '헥사 바이 구호'로 뉴욕에 데뷔했다. 현지 시간으로 2월10일, 탈피라는 주제로 열린 구호의 컬렉션은 평소 디자이너가 입던 재킷과 셔츠를 해체해 다시 조합한 의상들이 선보여졌다. 인체의 실루엣을 거스르는 그의 옷은 현대 무용과 잘 어울리는데 이런 특징을 반영이라도 하듯 쇼 직전 구호의 옷을 입은 무용수가 새처럼 날아오르는 단편 영상이 상영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모델 아그네스 딘과 한국 모델 강승현이 런웨이에 섰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