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의 사각지대, 홀 서비스에 대한 고찰

뉴욕 기반의 레스토랑 가이드 자갓의 서울판이 출간되던 1월의 어느 날, 남산 근처 호텔에서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서울의 레스토랑 200여 곳에 대해 맛, 서비스, 인테리어, 3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각 3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긴 이 책의 내용을 놓고 기자 중 한 명이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맛은 25점인데 서비스가 11점 밖에 안 되는 곳도 있더군요. 이렇게 되면 그 레스토랑의 주인이 00사(자갓과 제휴해 책을 낸 국내 카드회사)의 안티가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 자갓 부부 옆에 앉아 있던 카드사 임원이 내놓은 대답이 묘하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비스 점수가 좋지 않더라도 맛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오히려 대중에게 실속 있는 맛집으로 인식될 수도 있으니까요."

맛과 서비스의 불편한 동거

'맛 있는 집은 불친절하다'는 법칙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맛과 서비스는 정녕 실과 바늘 같은 긴밀한 관계인가, 시소처럼 한 쪽이 내려오면 반대 편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대척 지점에 있는 것인가. 다음은 가상의 레스토랑 소개 글이다.

레스토랑 A: 문 앞에서 환한 미소로 맞이하는 매니저와 있는 듯 없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 두 번째 방문일 뿐인데도 내 취향을 기억해 메뉴를 추천하고, 도대체 언제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 기척만 내도 금세 곁으로 다가오며, 소스를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시금치는 빼달라는 개인적인 주문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흔쾌히 접수한다. 맛도 괜찮은 수준. 점수를 매긴다면 85점 정도 줄 수 있겠다.

레스토랑 B: 들어서는데 일단 홀에 사람이 없다.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는 종업원들이라도 호출할라치면 기본 서너 번은 소리를 높여 외쳐야 온다. 나중에는 잔에 물만 떨어져도 목청부터 가다듬게 된다. 음식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없고, 식탁에 그릇을 물수제비 뜨듯 슬라이딩시키지 않아줘서 고맙다. 심지어 식사하는데 물끄러미 쳐다보기까지? 그러나 음식을 맛보는 순간, 오, 이것은 천상의 맛. 줄 수 있는 점수가 100점뿐인 것이 아쉽다. 물론 다 먹은 후에는 회포를 풀 새도 없이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위 두 개의 레스토랑이 나란히 매체에 소개된다면 어느 쪽으로 사람이 몰릴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식당은 일단 맛이다. 강원도 산간벽지의 소문난 산채비빔밥을 먹기 위해 차로 3시간을 달렸다는 사람은 봤어도 최상의 서비스에 목이 말라 1시간을 차로 달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식당에서 서비스는 엄연히 두 번째 영역이며 한국에 스타 셰프는 있어도 스타 웨이터는 없다. 그러나 우리라고 해서 훌륭한 서비스가 싫을까. 아무리 욕쟁이 할머니가 먹히는 나라, 불친절한 태도에 오히려 '맛에 자신이 있으니 저러는 것'이라는 이상한 미신이 도사리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친절하고 센스 있는 종업원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최근 미식 트렌드가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서비스에 대한 요구도 여간 깐깐해진 것이 아니다. 레스토랑 가이드 <블루리본 서베이>의 김은조 편집장은 책을 처음 낸 2006년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엔 멋 모르고 그야말로 '맛집'을 소개하는 데만 주력했죠. 그러나 곧 항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리본 3개를 받을 정도의 식당이라면 적어도 불쾌한 기분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는 거였죠."

수준급 서비스에 대한 갈증이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식당에서는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울까? 김 편집장의 말에 따르면 전문성의 부족이다.

"홀 서비스 인력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안 좋아요. 거의 아르바이트생 수준의 급여를 받고 손님들도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딱 그만큼의 서비스만 나오는 거죠."

해외에서 웨이터는 엄연한 전문직이다. 잘 나가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은 명문대 출신에 아르마니 수트를 빼입고 오히려 고객이 주눅들 만큼 세련된 매너로 그들을 리드한다. 음식과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기본이고 손님의 요구를 기분 좋게 수용, 때로 무리하다고 여길 경우 정중하게 커트하는 재량권도 가지고 있다. 손님이 질문 하나 할 때마다 쪼르르 지배인에게 달려가 물어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에는 '테이블 차지(table charge)'라는 시스템이 배경이 된다. 유럽과 미국의 식당에서는 각 웨이터에게 테이블이 할당되고 그 테이블에서 나오는 팁이 웨이터의 급여가 된다. 보통 1인당 3개 정도의 테이블을 서브하게 되는데, 손님 회전을 2번이라고 치고 한 테이블에 4명이 앉는다고 가정하면 24명이 지불하는 음식값의 15%가 그 웨이터의 일당이 된다.

식당에 따라 다르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경우 하루에 5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웨이터들도 꽤 된다. 셰프보다 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당연히 경쟁도 치열하다. 성과가 좋은 웨이터는 핵심 자리에 배치되고 실적이 없는 사람은 화장실 옆이나 문 바로 옆 테이블을 맡게 된다. 그 테이블에 고객이 앉지 않으면 그날은 허탕이다.

문필가이자 통역사인 요네하라 마리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식당 종업원은 "좁지만 한 나라 성의 주인"이다. "요리와 음료에 관한 지식, 화술, 몸가짐을 갈고 닦아 손님을 끄는 당당한 프로"인 것이다. 이들은 독립해서도 자기 고객을 끌고 다닌다.

한국에서는 주방장이 독립해 가게를 여는 경우가 많지만 서구에서는 종업원들이 독립해서 식당을 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요리사들도 홀을 주방의 종속 개념으로 보지 않고 요리를 만드는 업무와 손님을 접대하는 업무를 엄밀하게 구분해 존중해 주는 분위기다.

"얼른 쳐먹고 나가라구요?"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이번에는 받는 사람의 문제다.

"한 미래학자가 한 말이 있어요. 아시아의 두 가지 불가사의 중 하나는 황금만능주의인 중국이 공산화된 것, 또 하나는 부자들의 소비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한국이 공산국가가 되지 않은 거에요."

푸드칼럼니스트 이유진 씨는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최고급 음식과 서비스가 제공되는 정찬)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고급 서비스에 대한 대국민적 거부감에 대해 의아함을 표했다. 블로거들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체험기에는 '그 돈으로 급식 못 먹는 애들한테 밥이나 사주라'는 덧글이 종종 달린다.

어설픈 웨이터들의 태도를 꼬집으면 '맛있으면 그냥 먹지, 괜히 까탈부린다'고 혼난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는 착한 의견 같지만 왠지 모르게 분노가 스멀스멀 느껴진다. 상류층에 대한 고질적 질시가 미식 분야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과열된 민족주의가 더해지면 한층 가관이 된다.

서양 음식, 서양식 서비스를 모두 싸잡아 '양키 고홈'을 외치는 분위기 앞에서는 식문화 발전 모색이 무의미해진다. 깍듯하고 세련된 시중을 요구하거나 해박한 지식을 가진 종업원들로부터 와인을 추천받는 일련의 행위들은 어른들 말로는 '위화감 조성', 젊은 층에게는 '된장질', 그리고 아이들 말로는 '허세 쩌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질 높은' 그리고 '한국 정서에 맞는' 서비스가 간절한 요즘이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욕을 듣는 것도, 서구의 세련됐지만 철저히 상업적인 서비스도 원하지 않는다. 신라호텔 서비스 아카데미의 김학수 과장이 한국형 서비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객의 얼굴과 취향을 기억하고 고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서비스는 매뉴얼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브하는 사람의 마인드에서 나옵니다. 잘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해도 불쾌한 법입니다. 여기에 한국의 장유유서 정신, 위계 질서가 뚜렷한 조직 문화 등을 고려한다면 가장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서비스가 탄생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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