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님셔츠·원피스·재킷… 지금 패션계는 데님 이상 열풍

150년 전 광산촌에서 태어나 반항적 눈빛을 가진 청춘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가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 떼돈을 벌고 그 후 다시 이미지 업그레이드에 성공해 모든 상류 인사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도 모자라 현재까지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슈퍼 스타가 있다면?

일찍이 케네디도 꿈꾸지 못한 대중적 지지도와 마이클 잭슨도 누려보지 못한 기나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 세계적 스타의 이름은 다름아닌 데님이다.

클래식 중의 클래식, 고전 중의 고전. 잔혹하리만치 변덕스런 패션계에서 유일하게 '철밥통'을 꿰찬 데님이 올해 새삼스레 다시 트렌드로 떠올랐다.

이 푸른색의 비기능적이고 비효율적인 직물을 흉보려면 지금이 적기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시폰처럼 날아갈 듯 가볍지도 않고 모직처럼 매끈하게 떨어지지도 않으며, 게다가 색깔마저 보편적 감성에 호소할 만한 – 흙과 비슷한 갈색이나 무성의 회색 같은 – 어떤 요소도 담고 있지 않으면서 전 지구인의 유니폼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천에 대해 말이다.

물론 데님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클래식의 대명사라고 하지만 데님도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하며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 남았다. 디스트로이드(찢어지고 해진) 진이 유행할 때 빳빳한 생지 데님은 숨을 죽였고 몸에 꼭 맞는 진이 거리를 휩쓸 때 부츠컷 진은 TV 속 개그 자료로나 등장하며 비웃음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올해 데님 열풍은 기존의 청바지 모양 변화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클로에
차여도 할 말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데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 2월 한국에서의 첫 번째 매장 오픈을 위해 방문한 H&M의 신임 CEO 칼 요한 페르손은 올해 메가 트렌드를 묻는 질문에 제일 먼저 데님을 거론했다. 그가 말한 데님은 물론 청바지가 아니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한국을 뜨자마자 지하철과 버스는 온통 H&M의 데님 블라우스와 데님 셔츠, 데님 원피스, 데님 점프 수트 사진으로 도배 되었다.

한 브랜드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마주 붙어 있는 망고에서는 긴 셔츠처럼 편안하게 생긴 데님 원피스에 가죽 벨트를 한 모델 사진을 내걸었고, 자라 역시 쇼윈도의 모든 마네킹들이 어떤 형태로든 데님을 한 조각씩은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말 열린 서울 컬렉션, 루비나 쇼의 맨 앞 자리에 앉은 가수 바다가 밀리터리 풍의 데님 재킷 아래에 하얗게 물을 다 빼다시피 염색한 청바지를 입고 오면서 데님이라는 직물에 대한 이상 열기가 하의를 벗어나 모든 아이템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랄프로렌
위 아래를 모두 데님으로 입는 '청청 코디'는 오랫동안 금기였다. "청 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소개팅에서 차여도 할 말이 없는 시대가 꽤 오래 지속됐다. 아니, 지금도 과연 청청 코디가 돌아올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데님으로 치장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현재의 우리뿐이 아니다. 헐리우드의 유명 스타일리스트 레이첼 조는 "위 아래를 데님 일색으로 입는 것은 너무나 심각한 판단 착오"라며 "누가 그렇게 입은 것을 생각만 해도 내가 다 부끄러워서 탁자 밑으로 숨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유행이 처음 조짐을 보인 곳은 하이 패션이다. D&G는 지난 시즌 의상의 거의 절반 정도를 데님으로 채웠다. 터프하게 워싱된 데님 셔츠 아래에 이리저리 찢은 데님 바지를 매치하고 태닝 오렌지 색의 벨트와 부츠, 가방으로 숨통을 틔웠다. 자칫 집단 탈출한 카우보이처럼 보일 위험은 데님 셔츠 위에 눈을 시원하게 만드는 흰색 재킷을 걸치면서 사라졌다.

랄프 로렌은 "꼭 데님을 위 아래로 입고 싶을 경우 색을 달리하라"는 스타일리스트들의 간절한 조언을 깨끗이 무시하고 완전히 같은 톤으로 맞춘 과감한 청청 코디를 선보였다. 심지어 재킷과 조끼, 바지를 모두 데님으로 도배한 쓰리 피스 데님 룩까지 나왔다.

그러나 라펠이 달린 테일러드 재킷으로 변신한 데님은 우리 머리 속에 있던 혐오스런 청청 코디(벙벙한 청 재킷과 디스코 청바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라 실루엣의 변화만으로도 청청 코디의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불어 넣었다.

D&G
이 외에 칼로 자른 듯이 날카로운 미니멀 룩을 선보이는 에서도 한 벌 정도는 데님에 할애했다. 단추를 목까지 잠근 데님 셔츠에 조금도 구겨지거나 해진 흔적이 없는 깔끔한 데님 팬츠를 입고 흔히 매치하는 갈색 가죽 대신 검은색 벨트를 매, 위 아래를 데님으로 입어도 모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온 몸으로 데님을 즐기는 법

런 웨이를 떠나 리얼 웨이로 내려오더라도 데님의 새로운 매력을 만끽하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청청 코디를 받아 들이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라도 셔츠, 원피스, 조끼, 점프 수트까지 누릴 수 있는 데님 아이템은 너무나 많다. 이중 가장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데님 셔츠다.

아주 새파랗거나 어두운 색보다는 살짝 연하게 물을 뺀 것이 적당한데 올해 유행할 보이 프렌드 룩(남자 친구 옷을 빌려 입은 듯 헐렁한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대단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약간 품이 큰 검은색 재킷 안에 데님 셔츠가 살짝 보이도록 입고 아래에는 디스트로이드 진의 부리를 둥둥 걷어 올려 입으면 전형적인 보이 프렌드 룩이 된다.

이때는 데님 셔츠의 단추를 다 풀어 놓거나 위쪽만 풀어 놓아 이너웨어로 입은 티셔츠가 보여야 답답하지가 않다. 재킷 없이 데님 셔츠만 입는 것도 괜찮다. 품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데님 셔츠 아래에 레깅스를 신어서 원피스처럼 연출하든지, 꼭 맞는 셔츠 아래에 풍성한 발레리나 스커트를 입든지는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단, 상하의 중 하나만 부풀리는 게 안전하다.

이밖에 데님으로 만든 점프 수트나 원피스, 오버롤즈는 트렌드에 접근할 수 있는 제일 손쉬운 방법이다. 데님 재킷은 세련되게 소화하기가 비교적 어려운 아이템이지만 셔츠 칼라가 달린 기존 스타일만 피한다면 한 눈에 주목 받는 스타일을 만들 수도 있다. 역시 만만한 것은 아래 위의 색을 다르게 해 정통 청청 코디를 피해가는 것이다.

만약 청청 코디가 부활하더라도 단언컨대 다른 어떤 유행 못지 않게 빨리 지나갈 것이다. 데님의 질긴 생명력이란 어차피 인디고 블루 색상에만 한정된 이야기라 그레이, 화이트, 블랙으로 변주된 데님은 그다지 오래 지속된 역사가 없다.

게다가 청바지를 벗어날 경우 데님의 인기는 현저하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스트 패션의 시대에 굳이 이를 외면할 이유도 없다. 기왕이면 가장 유행 타는 디자인으로 골라 오래 간만에 데님의 매력을 온 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청청 코디가 다시 오려면 또 10년은 기다려야 할 테니까 말이다.

도움말: 카이아크만 정연선 디자인 팀장
사진: 카이아크만, style.com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