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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맥'과 '맥사'와 '사막'

막걸리+사케, 맥주+사케… 폭탄주의 웰빙 선언
민족의 술이 막걸리라면 국민의 술은 폭탄주다.

취하기라는 지상 목표를 빠르게 달성해주는 경제성, 분배를 통한 평등의 성취(다 함께 고주망태), 섞는 이의 취향에 따른 무한한 맛의 변주, 혼합 방법을 둘러 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까지.

굳이 많이 애용하자고 홍보하지 않더라도 폭탄주는 술자리, 특히 유대감이 절실한 소박한 술자리에서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처럼 '알코올이 초자아를 녹이는 용액'이라면 폭탄주는 초자아를 포함해 경계심, 긴장감까지 한 번에 녹여버리는 초강력 사교 용액이다.

문제는 위험성이다. 맥주에 소주, 기분 내킬 때는 맥주에 양주를 넣어 제조하는 폭탄주는 20도에서 40도에 이르는 독한 술을 단독으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에 다량으로 섭취하게 만드는 무서운 이면을 지니고 있다.

의사들이 경고하는 폭탄주의 위험도 바로 이 점이다. 급하게 취하는 것은 건강뿐 아니라 소통의 질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흐물흐물 풀어진 뇌로 아무 말이나 주워 섬겨봤자 다음 날 남는 건 '같이 망가졌다'는 동질감 정도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해서 포기하기에 폭탄주는 이미 우리의 음주 생활에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폭탄주를 제조해보는 것은 어떨까? 목구멍이 아닌 혀로 술을 마시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폭탄주 말이다.

사케가 맥주에 빠진 날

'탕'

나무 탁자를 손바닥으로 치는 경쾌한 소리. 맥주 잔 입구를 가로지르는 나무 젓가락 2개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진 사케 잔이 탁자의 진동을 못 이기고 맥주 잔 안으로 풍덩 빠진다. 보글보글 기포가 오를 때 잽싸게 들이키면 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맥주와 사케를 섞은 폭탄주 제조법이다. 사맥, 맥사 등 어떻게 부르든 자유지만 미국에서는 이 폭탄주를 사케밤(sake-bomb)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폭탄과 일본에서 연상되는 가미카제의 이미지 때문에 성인식을 치르는 소년에게 용기 있는 남자가 되라는 의미로 권한다고 한다.

소맥이 맥주와 소주 사이의 딱 적당한 알코올 도수를 찾는 여정이라면 사케밤은 여기에 향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와인처럼 신 맛, 매운 맛, 고소한 맛 등 수천 가지 향을 가진 사케가 맥주와 섞이면 맥주로 인해 농도가 묽어져 전체적으로 살짝 부드러워지면서 그 향은 고스란히 살아 남아 향긋한 맛이 난다.

소주가 20도인데 비해 사케의 도수는 평균 14도로 실제로도 소맥보다 더 순한 술인 셈이다. 맥주 특유의 향도 있으므로 맥주의 양이 너무 많으면 사케의 맛이 묻혀 버릴 수 있으니 양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재료로 사용되는 사케와 맥주에 특별히 제한은 없지만 도수가 낮은 맥주는 물 맛이 나 비리게 느껴질 수도 있으므로 도수가 약간 높고 맛이 진한 맥주가 적당하다.

압구정동에 있는 사케 다이닝바 '오가'의 이용진 사장이 추천하는 것은 아사히 맥주 반 잔에 오가 긴조 한 잔을 빠뜨리는 것. 국내 맥주부터 수입 맥주까지 전부 시도해봤지만 일본 맥주랑 궁합이 가장 잘 맞았다고 한다.

오가 긴조는 '상선여수'라는 사케를 오가에서 대량으로 구입하며 붙인 이름으로, 상선여수(上善如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이지만 주당들이 재해석한 바에 따르면 술이 목에서 넘어갈 때의 느낌이 하도 착하고 순해 그 부드럽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뜻이다.

사케밤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발효주끼리의 결합이라 다음날 숙취가 적다는 점이다. 소맥이 발효주인 맥주와 증류주인 소주가 만나 두통을 유발하는 반면 사케와 맥주는 같은 발효주에 곡주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어 무리 없이 잘 섞인다.

좋은 술로 시처럼 마셔라

사케밤이 맥주라는 대중적인 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라면 한국의 대중 술인 막걸리를 활용한 것도 있다. 막걸리와 사케를 1:1로 섞은 '사막'은 각자 향을 가진 두 개의 술이 만나면서 좀 더 역동적인 마찰을 빚는다.

사실 막걸리와 사케는 탁주와 청주로, 그 뿌리가 같다. 쌀로 술을 빚은 뒤 찌꺼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위의 맑은 부분을 떠내면 청주, 아래 탁한 부분을 떠내면 막걸리다. 일본의 사케 중에는 일부러 맑게 걸러내지 않고 탁주와 청주의 중간 묽기로 거른 종류도 있다.

사막은 제조 과정에서 분리됐던 두 술이 다시 만나는 셈이지만 일본과 우리나라는 술을 빚을 때 쓰는 쌀부터 완전히 다르므로 맛 또한 새로운 두 세계의 결합이다. 막걸리와 사케가 같은 비율로 섞이면 꼬리꼬리한 막걸리 향이 살짝 정제되고 사케의 색다른 향이 더해져 복잡미묘한 제 3의 맛이 난다. 사케로 인해 도수가 올라가므로 배불러서 막걸리를 못 마시겠다는 주당들의 입장에서는 한결 술다운 술이 된다.

사막 역시 사용되는 술에는 제한이 없지만 막걸리는 생막걸리를 추천한다. 맛도 맛이지만 생막걸리에는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천연 탄산이 들어있어, 사케와 섞으면 청량감이 더해진 '사케 샴페인'이 돼 술 맛을 한층 돋우기 때문이다.

새로운 폭탄주의 등장은 순한 술, 맛있는 술, 건강한 술을 추구하는 바뀐 음주 문화의 유쾌한 응용이다. 오직 취기를 위해 달려가는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빠른 만취의 대명사인 폭탄주도 퇴출 대신 변형을 택했다.

여기에는 최근 뜨고 있는 좋은 술들, 막걸리, 사케, 와인의 부상이 한몫을 한다. 낮은 도수, 특유의 향, 부드러운 맛을 가진 술들이 얽히고 설키며 취기 이상의 색다른 즐거움을 일깨우고, 제조와 분배로 이루어지는 폭탄주 놀이는 그대로 남아 술자리의 흥취를 돋운다.

사진 이자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의 저자인 박미향 씨의 말처럼 잘 마시면 약이지만 잘못하면 독이 되는 폭탄주는 어디까지나 '좋은 술로, 얌전히, 참하게 시처럼' 마셔야 제 맛인 것이다.

촬영협조: 압구정 오가
참고서적: <도시 심리학> 하지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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