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양지살 주원료로 만든 가공육 주로 샌드위치로 즐겨

뉴욕식 패스트라미 샌드위치
뉴욕의 낭만을 담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촬영 장소로도 잘 알려진 '캐츠 델리'.

주인공 맥 라이언은 이 곳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흉내를 낸 장면으로 인기를 얻었다. '도대체 무슨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길래?'

캐츠 델리는 소고기를 절여서 만든 뉴욕 정통 패스트라미와 이를 듬뿍 넣어 속이 든든한 샌드위치로 유명하다.

베이컨이나 살라미도 아니고 볼로냐고 아니고…, 거의 들어 본 적 없는 듯한 패스트라미는 소고기 양지살로 만든 일종의 델리 미트. 그간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최근 국내에 상륙, 팬 층을 넓혀 나가고 있다.

서울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국내 럭셔리 미각 소비자 1번지임을 자처하는 이 곳 지하 식품코너에 색다른 메뉴 하나가 등장했다. 바로 패스트라미(Pastrami). 미국에서 살다 오거나 뉴욕식 음식 문화를 접한 이들이 얼른 집어 들고 하는 말. "어! 이게 한국에도 있네!"

붉은 색 미트인 패스타라미(가운데)와 로스트 비프(왼쪽), 훈제 터키(오른쪽)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패스트라미는 우선 색깔부터 붉다. 시각적으로만도 전에 자주 보지 못하던 종류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맛을 보면 더욱 새롭다. 고기 같기도 하고 햄같이도 보이는데 씹으면 질감은 질긴 듯 한편으론 쫄깃하다. 거기에 약간 강렬한 후추의 매운 맛까지.

1800년대 중반 루마니아에서 건너왔다는 패스트라미는 뉴욕의 대표적인 유대인 음식에 속한다. 소고기 양지살을 주재료로 만든 수육과 비슷한 형태의 가공육. 고기도, 햄도 아닌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패스트라미는 보통 코리엔더와 후추를 넣어 훈제해 만드는데 맛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럼 강한 향이 싫다고 '순한 맛'의 패스트라미를 맛보려면 대신 '콘 비프'를 고르면 된다. 똑같이 양지살을 절여 만들지만 후추와 향신료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 다르다.

패스트라미를 먹는 가장 흔한 방법은 샌드위치로 먹는 것이다. 뉴요커들은 매장에서 직접 고기와 빵, 드레싱이나 스프레드를 선택해 자신의 기호에 맞게 주문해 먹는다. 정통 뉴욕식 샌드위치전문점들은 모두 이처럼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주문자 생산' 방식을 고수한다.

샌드위치가 아니라면 패스트라미는 샐러드에 섞어 얹기에도 적당하다. 채소만으로 허기지기 쉬운 배를 두둑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 치즈나 과일과 함께 와인 안주로 곁들여 먹기에도 좋아 인기를 높이고 있다.

패스트라미를 놓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또 놀라는 것 중의 하나. 미국 등에서 가져온 수입산이 아니라 국산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남부햄 등이 OEM방식으로 국산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소고기 양지살을 정선해 염지한 뒤 일정 기간 숙성시키는 것이 일반 제조 공정. 적당량의 소금, 향신료와 소스, 물 등을 배합해 숙성시키고 오븐에 굽는 등의 가공 과정을 거친다. 염장 숙성과 함께 저온으로 오랜 시간 구워내야 되는데 적당한 시간과 온도 등을 잘 조절하는 것이 기술이다.

샌드위치의 주재료로 쓰이는 패스트라미는 국내에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인 델리(Deli) 식문화와도 연관이 깊다. 델리는 고급 식품을 파는 가게라는 의미의 델리카테슨(Delicatessen)의 줄임말. 햄 소시지 등의 육가공품과 치즈, 가벼운 식사거리인 샐러드, 샌드위치 등의 조리식품을 판매하는 레스토랑을 일컫는 말이다. 즉석 조리식품이나 조리된 음식을 주로 판매하기 때문에 테이크 아웃(Take out)하거나 즉석에서 먹고 갈 수 있도록 해 바쁜 뉴요커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유명 델리에서는 패스트라미 등 햄을 직접 만들어 파는데 고기의 양을 고객이 직접 선택해 조절하기도 한다.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빵 또한 고유의 레시피로 직접 구워내는 곳들이 적지 않다. 피클이나 샌드위치 소스를 자체 조달해 사용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고기나 야채가 '추임새' 정도로 빈약하게 들어 있어 주로 간식으로 애용되는 한국식 샌드위치와는 개념이 다른 셈이다. 샌드위치 하나가 든든한 한 끼 식사여야 한다는 것이 뉴요커들의 생각.

뉴욕의 대표 샌드위치 브랜드로 이름 높은 루벤 샌드위치도 패스트라미와 낯설지 않다. 100여년 전 루벤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데서 이름 붙여진 이 샌드위치에는 패스트라미와 사촌격인 콘비프가 들어간다. 그리고 빵과 함께 샤워 크라우트, 스위스 치즈, 스파이스 러시안소스가 필수 식재료들.

루벤은 유명 여배우가 '배고프다'고 힘들어 할 때 서둘러 즉석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는데 여배우가 너무 맛있어 했다고 한다. 이후 유명세를 얻은 루벤 샌드위치는 지금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샌드위치 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

배가 유난히도 고팠던 그 여배우 뿐 아니라 특히 미식가들에게 패스트라미는 한 끼 먹으면 배가 든든해 지기로 정평이 나 있다. 루벤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양은 보통 100g. 국내에서 패스트라미 샌드위치를 처음으로 선보인 서울 이태원의 수지스델리에서는 200g이 빵 사이에 들어간다. 굳이 양 때문만이 아니라도 양지살은 소고기 중에서도 배를 든든하게 해주는데 손색이 없는 부위다.

패스트라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접할 수 있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 고객이 많아 미국식 식재료를 다양하게 갖추기로 이름난 서울 양재동의 코스트코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일산점에도 등장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세계적인 명문요리학교 '더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에서 패스트라미를 6개월간 공부하고 돌아온 수지스 델리의 박수지 대표는 "패스트라미는 국내에서 정통 뉴욕식 델리 문화를 소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