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운주사미륵세상 갈망하는 희망의 땅, 고난의 역사 돌탑처럼 켜켜이 쌓여

운주사와 와불
산사로의 여행은 일상의 치열함에서 벗어나 느슨한 삶의 울림과 이우고 닳아버린 마음결을 다듬어 보는 여행지로 제격이다.

더구나 이즈음의 절집 나들이는 길목부터 꽃등이 줄지어 마중 하며 신록의 풋풋함속에 다투어 핀 들꽃들 보는 재미와 대웅전 뜨락의 꽃나무에서 흩날리는 향기 공양까지 받는 호강을 누릴 수도 있으니 불심 깊은 불자가 아니더라도 햇살 좋은 날, 마실길 나서듯 느슨한 마음으로 설렁설렁 절집으로 들어서 보자.

바다처럼 광활한 나주 평야를 내려다 보는 천불산이 품고 있는 가람, 운주사. 운주사는 송광사의 말사로서, 도선대사의 창건설속에 천불천탑의 신묘함과 미륵세상에 대한 갈망이 담긴 희망의 땅이자, 민초들의 억압과 수탈의 고통과 고난의 역사가 돌탑처럼 켜켜이 쌓인 절이다.

운주사가 천불산 계곡에 있다지만 기실은 평지라 산사를 오르는 호젓함도 없고 근세에 중창해선지 고찰로서의 엄정함과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절 마당에 제 멋대로 놓여지고 솟은, 단순함을 넘어 투박하고 저어기 엉성하며 자유분방한 석탑들과, 기묘한 돌집에 석불이 있는 석조불감을 비롯해 가족인양 각양각색의 크기와 표정으로 곰살맞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비록 마모되고 훼손 되었지만 위장 된 미소나 과장 된 위엄이 없는 돌부처들은 할랑하게 절집마당을 휘젓는 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포옹하는 속닥한 풍경을 연출하고 보는이들 조차 마치 조각공원에 나들이한 착각속에 빙그레 웃음이 머금어지게 한다.

운주사 석조불감
일주문을 들어 와 가장 처음 만나는 보물 796호 9층석탑을 비롯한 석탑들과 석불은 그 형상이나 자리한 모습이 참으로 황망하다. 석탑들 대부분은 탑들이 삐죽이 하늘 높이 올려 지긴 했어도 신라의 섬세한 예술적 조각이나 백제의 아름다운 균형미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얼핏 보면 단순함을 넘어 투박하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형상이다.

돌탑 무리를 지나 몇발자국 옮기면 기묘한 돌집에 자리한 석불을 만나는데 보물 797호인 석조불감이다. 팔작지붕의 돌집에 남과북을 바라보는 불상 두개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상배불로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든,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석불이다.

길다란 얼굴에 단순한 선으로 표현 된 석불들의 형상은 법의는 대충 생략하거나 간결하게 처리한 모습이 짐짓 어설프기까지 하니, 혹자는 하룻밤에 천개의 탑을 쌓고 천개의 불상을 만느라 어쩔도리 없이 이런 투박하고 단순한, 그리고 조악한 형태의 석탑과 돌부처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며 에둘러 석공을 나무라거나 괜스레 오해를 한다.

허나 그 모두는 헛말이란다. 석질이 물러 잘 바스러지고 부숴지기 쉬운 운주사의 돌들은 오히려 단단한 화강암과 같은 재질의 돌을 다루는 것도 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과 솜씨가 필요한데, 비록 마모되고 훼손 된 돌부처들의 얼굴이지만 그 속에 여리하게 남은 표정들은 위장 된 미소나 과장 된 위엄이라곤 없는, 오히려 소박하고 친근함이 느껴지고 석질까지 헤아려가며 석탑과 불상을 만든 석공의 기술은 하룻밤새 조성한 천불천탑의 불가사의를 더욱 깊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여늬 절집에서 보듯 석탑들을 둘러친 보호막이 없고, 불상을 향해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경건함 대신 탑들은 자유롭게 돌부처와 어우러져 있고 할랑하게 절집마당을 휘젓는 관람객들은 돌부처를 친구삼아 어깨동무를 하거나 포옹을 한채 화사한 웃음을 날리곤 한다.

운주사 석탑들
운주사에 남아 있는 다수의 돌부처들과 석탑은 운주사의 초창기때부터 임진왜란까지 유유한 시간속 파란의 역사를 버텨 내느라 부숴지고 깨어졌으며, 지워지고 뭉개져 버린 흉흉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알싸하게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웅전을 비롯해 전각과 불상의 훼손이 심해져 폐사했던 것을 1918년 도암면장이었던 박윤수외 16명의 시주로 복원 했는데 당시 중건 된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등이 현존하며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했으나 현재 운주사에는 17기의 석탑과 석불 80기만 남아 있다.

운주사는 애당초 울도 담도 치지 않았기에 당연히 벽도 없고 경계도 없는, 온전한 열림과 소통을 주창했던 파격의 절집임을 입증하듯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별도의 문이 없이 어디로든 드나드는, 절집 둘레 전부가 문이다.

정문 같은 종무소 문지방을 넘어서면 눈 앞에는 아담한 대웅전과 정갈한 마당이 펼쳐지는데 절집 마당은 초파일이 갓 지나선지 줄지어 매단 꽃등으로 화사하게 꽃단장을 한채 다소곳 하고,흐드러지게 핀 불도화 향기가 바람결을 따라 너울거린다.

운주사 대웅전의 온전한 열림에 반하고 대웅전 마당의 곱디 고운 풍경에 마음이 홀렸다. 그러나 대웅전 뒷산의 마애여래좌불과 와불님을 뵈야 한다는 조급증에 간단없이 발길을 숲으로 돌려 세운다.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여래좌불님을 뵈알하고 내쳐 와불이 있는 숲길로 뛰어들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훤히 트이는 눈 앞에 드디어 1000번째 마지막 불상인 와불 두분이 사이좋게 나란히 누워 일행을 맞는다.

운주사 9층석탑
운주사의 와불이 일어 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일어 나시라!" 세세손손 올리던 간절한 기도가 이젠 이명으로도 들리련만 미완의 와불님은 청신한 하늘빛에 취했는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다.

와불님의 묵묵부답이 야속타고 궁시렁대며 내려서는 길섶에서 땅에 박힌 북두칠성을 만났다. 하늘의 별이 어쩌자고 운주사 산속에 내렸는지 모르지만 둥글넓적한 돌별은 영롱한 별빛으로 천불천탑을 비추려는듯 운주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단단히 박혀 있다.

"하룻밤만에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을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불상과 탑들의 모양새도 이상하고...그런데 알 수 없는 묘한 울림이 느껴져요. 처음엔 재미있고 신비스럽다가 갈 수록 알싸해지고 슬프기도 한게…."

운주사를 도는 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불상들을 들여다보고 탑들을 살폈던 동행이 북두칠성을 바라보다 마침내 담아 두었던 속내를 밝힌다. 돌아갈 길이 멀다는 동행의 채근으로 일주문을 벗어나서야 못난이 돌부처와 엉성한 모양새의 석탑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지 못했음을 알고 운주사를 돌아 봤다. 점점 멀어져 가는 9층 석탑이 뽀얀 햇살 아래 꿈꾸듯 서 있다.

그렇다 이제 운주사는 낙도 같은 먼 희망을 꿈 꾸는 절이 아닌, 친근한 고향 같은 꿈이 서린 변치 않는 염원의 절집이다.



양지혜 aikuc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