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남' 영향 턱, 코털에서 팔, 다리, 가슴, 겨드랑이까지

북슬북슬한 털에 대한 인간의 혐오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고대 이집트에서도, 그리스에서도, 로마 제국의 역사 곳곳에서도 눈물 겨운 제모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석회 가루와 풀 찌꺼기를 섞은 혼합물, 역청, 송진, 염소 쓸개, 작은 바닷조개(조개의 입을 벌리고 털을 물게 한 다음 잡아 뽑는다), 뱀을 말려 빻은 가루까지.

고대와 중세의 회화 작품에서 보여지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민둥민둥한 나체는 - 겨드랑이, 종아리, 팔, 심지어 성기의 털마저 싹 밀어버린 – 인간이 머리털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몸에 털이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왜 털로부터 도망갈까? <트렌드와 심리>의 저자인 김지헌 씨에 따르면 사람은 털을 밀어버림으로써 짐승의 흔적을 지우고 신에 가까워지고자 한다. 짐승과 인간의 교집합인 털은 덜 완성된 진화의 증거로서, 낮은 지능, 본능적 욕구, 비사회화 같은 덜 떨어진 단어들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의 털에 한정하면 이야기는 약간 복잡해진다. 여자의 털이 늘 마지막 한 터럭까지 축출 대상이었던 반면 남자의 털은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성별을 증명(또는 과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표식이기도 했다.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쳤던 로마의 군인들은 콧수염과 머리카락만 빼고 전신의 털을 다 미는 켈트족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계집애 같이 다리 털을 밀다니, 제 정신인가!"

<사랑의 기교>를 쓴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다리나 가슴의 털을 미는 남자들을 동양의 내시와 동일시하며 '계집애 같은 놈'이라고 욕하고 겨드랑이 털에 대해서는 더럽다고 펄펄 뛰었다.

"염소들의 왕, 저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숫염소가 네 겨드랑이 밑에 살지 않도록 하라."

남자의 털에 대한 미묘한 경계는 오늘날 미국 해군의 용모 규정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해군 남성 병사는 가슴 털을 깎지 않아도 좋다. 다만 털이 셔츠의 깃 위로 비집고 나올 정도로 길어서 볼썽 사나운 경우는 예외로 한다.'

남성용 제모기구
털의 미학적 비호감 외에 사회적 요인도 털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미국에서는 9ㆍ11 사태 이후 남성 제모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무성한 털이 아랍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미국 남성은 단순한 미용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식 생활 방식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는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털을 밀었다. 각종 제모 크림들이 쏟아져 나왔고 남자들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섰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수염을 제외한 다른 부위, 특히 다리나 팔의 털을 미는 남자는 아무래도 생소하다. 털이 부숭부숭한 여자들을 두고 레즈비언이라고 수군대는 것처럼 매끈하게 다리 털을 미는 남자는 게이라는 뒷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누가 뭐래도 지금은 확실히 '털 없는 남성'의 시대다.

짐승이었던 과거의 흔적을 지우자

"6년 전에 비하면 거의 10배 정도 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지미 클리닉 고경덕 원장은 피부과 개원 이후 가장 많은 남자 손님들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100명 중 95명이 여자 손님이었죠. 그것도 겨드랑이 제모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즘엔 남자들이 많이 찾아와요. 부위도 턱, 콧수염, 구레나룻부터 팔, 복부, 성기, 항문 주위까지 다양해졌어요."

원장의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북슬북슬한 털이 흉해 그 숱을 줄여보려는 남자들이 대다수지만, 그 중에는 아예 영구적인 제모를 통해 매끈한 살갗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수염을 좀 남기는 게 아니라 아예 없애 달라고 해요. 모낭염 같은 피부 트러블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용적 측면에서 하는 남자도 많아요. 얼굴에 털이 없으면 확실히 어려 보이긴 하거든요."

일본의 카피라이터인 우시쿠보 메구미는 <초식남이 세상을 바꾼다>에서 수영복 입은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남자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일본의 25~35세 남성을 인터뷰한 결과 40% 가량은 수영장에서 수영복 입기를 꺼렸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종아리 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라는 것. 일명 초식남이라 불리는 그들의 90%는 가방 속에 헤어 스타일링제를 넣고 다니며 공중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느라 마치 여자 화장실처럼 북적대게 만드는 주역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최근 남자 제모 관련 용품의 매출이 지난 해와 비교해 약 200% 증가했다고 밝혔다. 여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여성이 독립적이 될 때 미소년 애호가 생겨난다. 점점 더 강해지는 여자들과 그에 맞춰 자신의 야만성을 밀어버리려는 남성들이 만들어 내는, 바야흐로 남성 제모의 시대다.
참고서적: 털, 다니엘라 마이어

"집에서도 영구 제모가 가능하다고?"

피부과의 고유 권리였던 영구 제모가 드디어 민간의 손으로 넘어왔다. 미국 트리아뷰티의 레이저 제모기가 지난 5월말 국내 출시된 것. 3대 레이저 중 하나인 '라이트 쉬어' 개발진이 직접 만든 최초의 가정용 영구 제모기다.

검은 색소에 레이저가 반응해 모낭을 무력화해 점점 털이 가늘어지고 나중에는 아예 자라지 않는다는 원리로 8회 가량 시술하면 영구 제거된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피부과에서 시술해도 결국엔 다시 나는 등 말이 많았던 레이저 제모, 과연 집에서도 가능할까?

먼저 기계 충전이 필요하다. 3시간 충전에 20분 사용이라니, MP3 충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당황스럽지만 기계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20분 이상 들고 있는 것도 쉽지가 않다. 피부는 깨끗이 씻은 뒤 면도하고 물기를 닦아낸다. 피부과 레이저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레이저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따가운 레이저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반가울 수 없는 소식이다. 가운데 있는 단추를 누르면 1단계 강도로 조정된다.

그대로 피부에 갖다 대면 두 번의 '삐' 소리(시작음과 종료음)가 울리는데, 이러면 제대로 레이저가 쏘였다는 뜻. 여기서 별로 따갑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버튼을 한번 더 눌러서 강도를 올리면 좋다. 살짝 따가울 정도가 돼야 가장 높은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단계 정도로 맞춰 놓고 기계를 조금씩 옮겨가며 종아리 한쪽을 다 끝낼 때쯤 되면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러므로 한 번에 온 몸의 털을 제거하기는 무리고 딸려오는 스케줄 표에 다리, 수염, 팔 등으로 표시해 놓고 주기에 맞춰 시술하는 것이 좋다. 처음 3개월 간은 격주로, 그 후 3~5개월 간은 매달 1차례씩 하면 8개월 정도 만에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안전성에 상당히 신경을 썼지만 눈에 손상을 줄 위험 때문에 회사 측에서는 가능하면 코 아래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이 밖에도 유두, 성기, 항문 등 피부 색이 어둡고 털의 밀도가 높은 곳 역시 피해야 할 부위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