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명 와인메이커, 1970년~2000년산 블라이드 테이스팅

샤또 보네·라 루비에르 올드빈티지
좋은 포도는 좋은 와인으로 태어난다. 또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맛과 향이 더 성숙해질 수 있다.

그래서 오래된 좋은 와인들은 비싸다. 특급 와인에 속하는 올드 빈티지(Old Vintage) 와인들이다. 시장에서 때론 수백만 원대에도 거뜬히 팔려 나간다. 하지만 이런 패러다임이 약간은 변하고 있다.

프랑스의 유명 와인메이커 앙드레 뤼통의 로렌 벨리제르씨가 일단의 와인들을 가지고 방한했다. 와인 병 라벨에 적혀 있는 연도가 눈에 띈다. 2001이나 1990은 기본, 1970년 산이라고도 적혀 있다. 시장에서 그리 흔치 않은 올드 빈티지 와인들이다.

하지만 벨리제르씨가 가지고 온 와인 중 하나는 불과 몇 만원대, 정확히는 숍에서 6만원 선이다. 아주 오래된 전형적인 올드 빈티지 와인의 그간 이미지와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이제 신개념의 올드 빈티지 와인이 대중들에게 다가 오고 있다. 지금 백화점이나 마트 등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와인들은 병 라벨에 2008이나 2007, 혹은 2006이라고 쓰인 것들이 제법 많다. 모두 2~4년 전인 2006~2008년 산 포도로 담근 와인들이라는 표시. 지난 해 2009년이라고 쓰인 와인은 타이밍상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한다. 담근 지 불과 몇 일 만에도 마시는 보졸레 누보는 예외다.

'샤토 시마르' 올드 빈티지 와인
그럼 2006년 이전의 와인들은? 분명 다 마셔 버렸거나 팔렸거나 적어도 누군가 어딘가에서 보관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품질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포도의 품종과 보관되는 환경이 중요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디며 살아 남은 와인들은 가히 최고급 와인으로 꼽힌다. 이름만으로도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올드 빈티지 와인들. 100만원대 부근에서 가격이 형성되는 것들이 적지 않고 저렴하다는 것들도 수십 만원은 넘는다. 오랜 시간 결코 상하지 않고 맛과 향이 무르익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샤또 보네의 와인 메이커인 앙드레 뤼통은 자신의 밭에서 포도를 수확한 1956년부터 생산한 와인 중 100케이스(12병)를 별도로 보관해 왔습니다. 개인 소장용 목적이었는데 지금은 엄청난 양이 쌓이게 됐죠. 한 마디로 곳간을 연 것입니다."

벨리제르 아시아 수출 담당 이사는 "그런 그가 이제는 해외 와인 소비자들을 위해 올드 빈티지 와인들을 개방해야겠다고 단안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금도 뤼통의 셀러에는 아무런 라벨이 붙여지지 않은, 오래된 와인 병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앙드레 뤼통은 보르도에서 와인제국이라고 불리는 가장 큰 와인 패밀리 생산자로 이름 높다. 무려 12개의 샤또를 보유 중이다. 더욱이 1956년 버려진 땅을 일궈 오늘날의 샤또 보네를 탄생시킨 그는 독특하게도 12개 샤또 모두를 폐허에서 시작해 수십 년에 걸친 노력으로 재건시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 업적으로 그는 오늘날 와인업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린다.

올드 빈티지 와인을 소개하는 앙드레뤼통의 로렌 벨리제르 이사
그가 선보이는 대중적인 올드 빈티지 와인 '샤또 보네'는 해외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프랑스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애용되는 와인으로 이름 높을 뿐더러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는 가장 가치 있는 보르도 와인으로 꼽았다. 90년대 미국에서는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과연 오래된 와인들의 맛은 괜찮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샤또 보네는 국내에서 선뜻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허락했다. 올드 빈티지 와인들을 내놓고 눈과 귀를 가린 채 맛 테스트를 벌인 것. 1970년산부터, 1990년, 91년, 2000년 빈티지의 와인들이 시험대에 올랐다.

"연륜이 있지만 늙지는 않았어요. 잘 익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오래된 와인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내린 공통된 평가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는 소위 에이징(Aging) 포텐셜 파워를 자랑한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올드 빈티지 와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심플한 보르도 와인들과 테이스팅하면 샤또 보네는 터프한 AOC와인이나 상위권 메독 와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벨리제르 이사는 가끔 올드 빈티지 와인과 일반 와인을 비교 테이스팅하거나 연도별로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 일반 대중에 적극 소개되는 올드 빈티지 와인은 비단 샤또 보네 경우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샤또 라 루비에르의 올드 빈티지가 국내 시판을 앞두고 있고 생떼밀리옹의 샤또 시마르의 오래된 와인들도 이미 시장에 소개됐다. 또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후루카스 호스탱 와인 또한 상륙을 앞두고 있다.

올드 빈티지 와인은 하지만 양이 풍족하지는 않다. 샤또 보네의 경우 단 600병만 들여왔다가 호응이 높아 추가 주문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겨우 1200병에 불과하다. 매장도 와인숍으로는 와인나라 한 곳뿐이고 그나마 레스토랑은 민가다헌과 베라짜노, 두가헌, 그안 등 여러 곳에서 맛볼 수 있다. 아무래도 특급 올드 빈티지 와인에 비해 저렴하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이다.

국내 시장에서 올드 빈티지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와인 메이커들의 오래된 와인 소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방한한 레오빌 포이페레의 올리비에 큐블리에 대표는 27년 전의 와인을 가져와 직접 테이스팅을 벌였다. 1983년산 와인으로 숍 판매 가격은 한 병에 80만원대. 그랑크뤼 2등급의 와인으로 자두와 블랙커런트, 시가의 아로마, 세련된 구조와 적은 산도, 강렬한 과일 맛, 실크와 같이 부드러운 탄닌 맛이 잘 어우러진다는 평을 들었다.

"오래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한편으론 위험한 시도입니다. 질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일단 와인에 대해서 잘 알거나 적어도 즐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제 한국 시장도 대중이 올드 빈티지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시장이 무르익고 있다고 봅니다." 아영FBC 김영심 부장은 "한국 와인 소비자들도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