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후문 한정식 레스토랑 이야기

1980년대부터 서울 이화여대 후문 근처를 자주 지나쳐 본 이들에게 공통되게 기억되는 음식점 이름이 있다.

후문 건너편 대로변에 선명하게 보이는 두 개의 다른 간판, '마리'와 '석란'이다. 걸어갈 때는 물론,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있을지라도 이상하게 두 집은 마치 '동네의 대표자'들인 양 눈에 띄었다.

이 둘은 사실 한정식집들이다. 모두 개성식 한식 메뉴를 내놓는다는 점이 공통점, 그렇게 이어온 세월이 근 30년이나 된다, 하지만 26년 전통의 마리가 최근 완전 변신에 나섰다.

마리의 창업주는 김영호 여사. 2006년 작고한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의 부인이다. 남편의 공직생활 동안 외국 사람들을 접대하면서 느꼈던 '한식의 지나치게 거창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서양식 코스 메뉴 같은 한정식을 선보였다.

그리고 바로 옆에 들어선 석란, 공교롭게도 두 집은 알고 보면 친척집이다. 주인은 김경호씨로 김영호 여사의 6촌 동생이다. 석란은 1981년 지금 자리에 들어섰고, 마리는 중구 묵정동에서 담소원을 운영했던 김영호 여사가 1984년 이 곳으로 이전했다.

개성 지주 집안의 딸로 태어난 김 여사는 어릴 적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마리를 열고 나서 타고난 음식 솜씨 덕분에 마리는 대한민국 정계, 관계, 재계 고위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한국 전통음식을 제공하는 품위 있는 음식점을 모토로 내건 석란 또한 마찬가지.

사람들의 입맛과 시대의 변화에 맞춰 마리가 새롭게 내건 슬로건은 '한식의 세계화를 겨냥한 우리 음식의 재해석'이다. 신토불이 우리 땅에서 난 신선한 식자재를 쓰면서도 한식이나 양식, 일식, 중식 구분 없이 세계인이 즐길 만한 한식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요약해 짧게 말하면 '모던 한식'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음식들을 수십 년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오다 보니 손님들이 이전 메뉴들에 식상해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리의 박재근 한식 조리장은 "젊은이들의 입맛에도 새롭게 맞춰야 하고 음식에 새로운 활기와 생기를 불어 넣어줘야 될 때가 됐다"고 말한다.

한식의 또다른 변화를 꾀하는 마리는 사실 출발 때부터 한정식의 새 경지를 선보이며 관심을 끌었다. 가장 큰 차이라면 커다란 상에 많은 종류의 반찬들을 늘어 놓는 남도식 한식 상차림과는 차별화한 것, 실리적이며 순서대로 먹을 만큼만 나오는 코스 형식으로 개성 출신들의 실용적 식단을 선보이며 호응을 받았다.

이런 간편하고도 실용적인 식단은 또 다른 유명 한식당인 용수산에서도 확인된다. 용수산을 개업한 최상옥 사장 역시 김영호 여사의 아버지, 김기선의 사촌 형 며느리다. 달리 말해 최상옥씨는 김영호 여사의 6촌 오빠 부인이다. 대한민국 한정식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용수산 또한 마리, 석란과 비슷한 시기인 1981년 서울 삼청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

마리와 석란, 용수산 세 곳은 모두 개성 한정식이며, 주인들 또한 친척들이라는 점, 삼청동과 이대 후문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근접성 등의 이유로 서울 시내에서 '한정식의 본고장'으로도 불린다.

특히 연대와 이화여대를 낀 신촌 지역이 외국인의 출입이 잦은 곳이란 점도 마리와 석란이 한정식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을 줬다. 외국 관광객들보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먼저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마리에는 지금 한식 셰프와 양식 셰프가 같이 일한다. 한정식 레스토랑에 양식 조리장이 따로 있다는 것은 드문 경우. 김경근 양식 조리장은 "음식의 기본 베이스는 한식으로 잡지만 특히 디테일한 부분은 양식의 입장에서 꾸며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음식의 구성이나 데코레이션, 가니시 등에서 한식과 양식 콘셉트가 믹스돼 있다는 것은 메뉴 이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샴페인 폼을 얹은 대하잣소스 냉채, 청매실 젤리와 알로에 모히토, 아귀간 두부 무스, 장미 폼 뽕잎 가루 크림치즈, 단새우와 열대과일 쳐트니를 곁들인 멍게, 푸아그라 크렘블레, 금귤 컴포트와 유자 드레싱 등.

예전부터 그랬듯 지금 새로운 마리에도 유명인사들이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나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 등은 벌써 미식가로 이름을 올린 단골 고객. 무형문화재 장용훈 선생이 수제작한 '장지방' 한지와 전주 천양한지로 도배한 벽면, 한국 전통 문살 문양의 천장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오래된 느낌을 풍긴다.



글·사진=박원식 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