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고명 벗고 팥, 얼음, 떡 3개로 소문난 맛집들

빙수에도 트렌드가 있다. 10년 전에는 딸기 빙수를 먹기 위해 어른이고 학생이고 할 것 없이 숙명여대 앞으로 몰려들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차 얼음을 갈아 그 위에 녹진녹진한 녹차 아이스크림을 얹은 녹차 빙수 때문에 청담동 카페들이 북적였다.

녹차, 커피, 프루츠 칵테일, 아이스크림, 젤리, 무엇을 얹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해온 빙수는 올해 어쩐 일인지 그 화려한 변주를 그만두고 기본으로 돌아갔다. 우유 섞은 얼음을 갈고 그 위에 팥을 얹은, 고명은 떡과 미숫가루 정도로 엄격히 제한한 '그냥' 팥빙수가 올 여름 빙수 트렌드다.

토핑을 줄이고 나면 다른 재료들의 질은 한층 예민하게 도마에 오르게 된다. 각종 시럽의 보조를 벗어난 팥은 대번에 중국산과 국내산으로 맛이 갈린다. 크기는 크지만 예의 향이 부족한 중국산 대신 진하고 깊은 맛을 내는 국산 팥을, 팥알이 겨우 모양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삶아야 한다.

얼음은 더 중요하다. 물로 얼린 얼음은 청량감이 있고 높이 쌓을 수 있는 대신 입자가 다소 거칠고 맛이 풍부하지 않다. 우유로 얼린 얼음은 맛이 고소하고 질감이 부드러운 대신 볼륨감을 내기 어렵고 입 안이 질척거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물과 우유의 비율은 소위 클래식 빙수를 지향하는 집들의 극비 사항이다.

달콤한 연유를 어느 정도 넣을 지도 얼음의 당도와 팥의 당도를 조절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유일하게 허락된 고명인 떡은 설탕 범벅 밀가루 떡 대신 방앗간에서 당일에 뽑아온 말랑한 찹쌀떡이어야 하며 식욕을 촉진시킬 수 있도록 큼직하고 투박하게 썰어야 함은 물론이다.

팥빙수도 미니멀리즘

이 미니멀하고 예민한 팥빙수의 원조는 밀탑이다. 물 비린내 나는 거친 얼음 대신 우유와 연유를 섞은 얼음을 눈처럼 곱게 갈고, 그 위에 20년 동안 팥만 삶으셨다는 70대 할머니가 네다섯 시간씩 졸여 만든 국산 팥을 얹고, 마지막으로 말랑거리는 찰떡을 얹어 완성한 단순한 빙수는 연 매출 수십억 원대의 대박 신화를 만들었다.

'조만간 대기표를 뽑고 먹어야 할 것'이라는 농담은 현실이 되어 붐비는 시간에 밀탑에 간 이들은 18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대기표를 받아들고도 포기하지 않는다.

올해 7월 동부이촌동에 문을 연 동빙고는 밀탑의 빙수를 그대로 재현한다. 일단 팥빙수보다 위에 올라 있는 단팥죽 메뉴가 팥의 퀄리티에 대한 신뢰감을 부추긴다. 루시파이 사장이기도 한 동빙고 주인 최윤희 씨는 부드러운 우유 얼음 위에 미숫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물 얼음을 쌓은 뒤 팥을 얹어, 모양도 맛도 클래식한 옛날 빙수를 선보인다.

비좁은 가게에 체리 하나 올라가지 않은 초라한 빙수가 나오는 순간 실망하기 십상이지만 맛은 반전 그 자체다. 얼음은 너무 부드러워 눈을 한 숟가락 머금은 것 같고 가당 연유와 우유를 섞어 갈은 우유 얼음은 팥의 필요를 잊을 만큼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맛있다.

실팍하게 썬 네모진 떡은 찹쌀떡에서 가루만 털어낸 것처럼 쫀득쫀득하며 마지막 한 수저에 팥도 얼음도 남지 않는 비율까지 완벽하다. 미숫가루를 넣을 지 여부는 주문할 때 물어보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뺄 수도 있고 넣을 수도 있다.

팥의 질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들은 고속터미널 근처 '엄지빈'을 최고로 친다. 전남 화순에서 재배한 팥과 쌀이라고 메뉴판에 당당히 써 붙인 것처럼 팥 농사를 짓는 사장의 어머니가 직접 올려 보낸 팥을 삶아 만든다. 팥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주인은 섞지 말고 있는 그대로 떠 먹기를 주문하는데 과연 다른 가게들에 비해 단 맛이 적은 데도 불구하고 팥 고유의 맛이 이를 전부 커버할 만큼 진한 팥 향이 제대로다.

얼음은 물과 우유, 연유를 한데 넣어 간 것으로 부드러움과 바삭거림, 리치함과 가벼움, 딱 중간 정도로 비율을 맞췄다. 떡도 직접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데 방앗간에서 뽑은 것처럼 말랑거리지는 않지만 전문성이 떨어지는 대신 건강함이 느껴진다. 맨 위에 올리는 대추 크러스트는 심심한 팥빙수의 모양과 식감을 보완한다.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싹 말려 대추 향을 싫어하는 이들도 씹는 맛에 먹을 수 있다. 팥의 양이 비교적 적어 마지막에 얼음만 남는 경우가 많지만 리필은 안 된다.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모양새 때문에 보통 빙수에 흥미 없는 이들에게는 송스 키친이 제격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송혜진 씨는 복고풍의 깊숙한 보울에 얼음과 팥을 푸짐하게 담고 가래떡처럼 썬 찰떡에, 설탕에 절인 완두콩 네 개를 얹어 입도 눈도 만족시키는 훌륭한 보통 빙수를 만든다.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서 본 것 같은 장식장을 옆에 두고 푸짐한 빙수를 떠먹는 맛이 특별하다. 직접 삶은 팥은 아니지만 국산 팥을 사용하고 미숫가루와 떡은 방앗간에서 따로 맞춘다. 거칠거칠하게 갈은 얼음에 주인의 취향대로 미숫가루를 듬뿍 넣는데 고소한 맛이 상당히 강하므로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여자 두 명이 먹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양이 많다.

빵집에서 시켜 먹는 팥빙수가 그립다면 압구정동 '르 알래스카'에 가면 된다. 작고 투명한 빙수 그릇 위에 물로 얼린 얼음을 설산처럼 높이 쌓아서 내오는데 중간에 2단으로 들어 있는 팥과 우유 셔벗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입 안이 꽁꽁 얼 때까지 얼음을 퍼먹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우유와 팥의 함량이 적기 때문에 팥빙수로 배 불리는 것이 싫은 이들에게 적합한 가벼운 빙수다. 국산 팥을 직접 쑤어 만들며 콩가루를 더해 고소하다. 오히려 위에 올려주는 산딸기 잼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

이밖에 호림 미술관 1층의 카페 아티제에서도 여름 한정으로 빙수를 선보이고 있다. 팥빙수의 원산지인 일본에서 들여온 제빙기로 곱디 고운 얼음을 갈아 국산 팥을 얹고 정방형의 떡 4개를 심플하게 올렸다. 가격이 비싼 만큼(1만3000원) 양도 많다. 나폴레옹 과자점 역시 보들보들한 우유 얼음에 계피향을 살짝 더한 팥, 매일 새로 만드는 떡으로 만든 클래식한 빙수를 맛볼 수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