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연, 국민성이 빚어낸 글로벌 브랜드, 나라 전체가 작품

암스테르담의 조형물
상업과 예술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상에 있다. 적어도 한국 땅에서는 그렇다. 기업은 되도록 싼 가격에 팔릴 만한 그림을 만들어 주길 원하고, 작가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뒤틀린 조소를 날린다.

어느 한 쪽의 주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하므로 결론은 늘 평행선이다. 그러나 약간의 세제로 물과 기름이 기적처럼 엉겨 붙듯이 예술과 상업이 하나가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오렌지의 나라 네덜란드다.

교도소부터 경찰차까지, 공공미술의 천국

네덜란드 디자인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전 세계 디자인계를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표본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모범 사례다. 더치(Dutch) 디자인에 대한 국제사회의 태도는 향유를 넘어서 필요에 가깝다.

멀쩡한 사람도 미아로 만든다는 뉴욕의 JFK 국제공항의 안내 표지판을 바꾸는 과정에서 주정부는 자국의 디자이너들로는 해결을 보지 못하고 암스테르담의 디자이너 폴 마익세나아를 불렀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현재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국내 도로 교통 표지판 개선 사업 뒤에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스튜디오 둠바가 있다.

크리스 카벨의 '스티키 램프'
둠바, 렘 쿨하스, 드룩, UN스튜디오, 토털 아이덴티티 등 네덜란드 발 유명 디자인 회사들과 디자이너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암스테르담 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궁금증이 일어난다. 대체 무엇이 이런 나라를 가능케 했을까? 공항 표지판에서부터 우체국, 공중전화부스, 상점 간판, 경찰차까지 모든 것이 작품이다.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작가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네덜란드 디자인 회사의 주요 클라이언트 목록에는 국영 기업과 공공 단체가 다수 포함돼 있다. 교도소를 지을 때도 디자이너부터 찾는다는 네덜란드 공공 기관들은 민영 기업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젊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수용한다. 이를 위해 안전하고 보편적인 디자인을 내놓는 대규모 디자인 회사보다 개인 또는 소규모 스튜디오에 작업을 의뢰하는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 로테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우정통신공사의 경우 자국의 유명한 디자이너 치고 이 곳의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러다 보니 네덜란드의 디자이너들은 공공부문이 디자인 산업에서 큰 기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자각하게 되며, 공공재 디자인에 깊은 관심과 책임을 느낀다. "자유롭고 실험적이면서도 사용자나 관객 등의 '공중'을 진지하게 배려한 디자인"이 가능한 것은 이런 바탕에서 연유한다.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의 디자인 여행>의 공동 필자인 최성민 씨는 이 선순환 구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디자인 사용자를 타깃으로 여기는 착취적 상업주의와 디자이너의 개성, 창의성에 매달려 사용자를 숭배자로 격하시키는 무모한 작가주의를 모두 넘어서는 가능성이 네덜란드 디자인에 있다."

인구 1600만의 작은 나라에서 소규모 스튜디오들은 디자인 업계의 심장부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마음 맞는 몇몇이 모여, 또는 혼자서 디자인 사무소를 개업한다. 국가는 신출내기 디자이너들이 대기업에 취직하지 않더라도 자기 일을 하며 먹고 살 수 있도록 후원해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창의성은 다만 내세우기 위한 기치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건물이 되며, 표지판이 된다. 상업과 예술이 극적으로, 그것도 아주 이상적으로 조우한 것이다.

둠바가 디자인한 경찰차
특징? 특징이 없는 게 특징

"물론 모든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이 마냥 행복하게 일하는 건 아니에요."

얼마 전 홍익대 상상마당에서는 네덜란드 디자인 워크숍이 열렸다. 스튜디오 둠바의 시니어 디자이너 에릭 더 플람과 온트베릅베르크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황선정 씨가 더치 디자인에 대해 말하기 위해 귀국했다.

국내 디자인업계 종사자와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자리를 채웠고, 곧 디자인의 천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작업환경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정말로 클라이언트들이 디자이너의 독창성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성찰의 시간도 충분하게 주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에릭은 "Case by case(때에 따라 다르다)"라고 답했다.

황선정 씨는 "가끔은 이상한 클라이언트들을 만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전반적인 성향을 살펴보면 의뢰인들의 마인드가 열려 있는 편이에요. 한국이라면 단번에 거절할 만한 엉뚱한 아이디어도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죠. 이게 다양함을 특징으로 하는 네덜란드 디자인의 원동력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로테르담의 우정통신공사
특징이 다양성이라는 것은 인류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말이다. 세계화 시대의 급진전 속에서 각 민족의 특성을 한 줄로 요약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지만, 네덜란드 디자인은 소박한, 아방가르드한, 실용적인, 유머러스한 등의 한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실제로 동시대에 활동하는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들을 살펴 봐도 누군가는 극단적인 장인 정신에 입각해 작품 활동을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영국 미니멀리즘의 계승자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스위스 형식주의 전통을 네덜란드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오히려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거친 윤곽선을 그릴 수 있다. '충분한 성찰의 과정을 거친', '사용자를 세심하고 따뜻하게 배려한', '디자이너의 정치ㆍ사회적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있는' 등등.

이런 디자인이 탄생한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그룹 익스페리멘털 제트셋의 설명이 가장 와 닿는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네덜라드다움'에 대해 자국 환경의 인공성을 들어 이야기했다.

"네덜란드의 국토는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만든 땅이다. 이 경험에서 네덜란드는 민족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들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개념이 자라났다. 물론 다른 요소도 있다. 칼뱅주의와 가톨릭의 독특한 결합, 황금기에 축적한 어마어마한 부, 평등지향적 부르주아 사회 등등. 네덜란드 문화는 위대한 예술적 제스처에 별로 관대하지 않다. 네덜란드 사회는 창조성을 고립시킨 제스처 하나에 집중시키기보다 체계적이고 평등하게 일상생활에 확산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자기들이 딛고 선 터전까지 디자인해 온 네덜란드인들. 그 끊임없는 만들기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돼 세계 곳곳에서 그 흔적과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서울이 선정됐다. 역사와 자연환경, 국민성이 빚어낸, 그 자체로 글로벌 브랜드인 더치 디자인은 우리에게는 시간을 두고 고찰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 몇몇이 머리를 모아 '꽃담황토색' 택시를 만드는 것 말고 보다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가 느껴질 때까지 말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드룩'
참고서적: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 안그라픽스, 최성민, 최슬기 공저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네덜란드> 산처럼, 주경철 저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