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코즈', '랩5' 등 속도와 가격 경쟁력 갖추고 진화

올해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에서 남성 디자이너상을 받은 랙앤본, 스웨덴의 대표적인 컨템포러리브랜드 미니마켓, 뉴욕 힙한 젊은이들의 패션을 대변하는 밴드오브아웃사이더, 오리지널 프렌치 시크에 페미닌한 감성을 더한 가트르몽.

세계적인 핫 브랜드지만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아 아직 생소하기만 한 이 옷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 굳이 해외에 나갈 필요가 없다. 최근 오픈한 편집숍 와 블리커에 가면 이 브랜드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20~30대를 위한 유니크한 패션을 표방하는 는 8월 13일 롯데백화점에 문을 열었고, 미국 뉴욕 스타일의 남성 멀티숍 블리커는 8월 26일 현대백화점에 1호점을 냈다.

비싸고 난해하기만 한 편집숍?

'편집'은 지금 한국 패션 유통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다. 이것 저것 고른다는 의미에서 '셀렉트숍', 다양한 브랜드가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멀티숍'이라고도 불리는 편집숍은 적게는 4~5개, 많게는 수십 개의 브랜드에서 특정 아이템만을 골라 매장을 꾸미는 형태를 말한다.

한 브랜드의 풀 컬렉션 대신 여러 브랜드의 옷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일관된 콘셉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바이어의 안목에 따라 단일 브랜드 이상으로 확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이 많다. 각 브랜드에서 제일 괜찮다고 생각하는 옷들만 쏙쏙 골라오기 때문에 한 브랜드가 발휘할 수 있는 감성의 한계를 편집숍은 쉽게 뛰어 넘는다.

바이어의 능력만 뒷받침된다면 편집숍은 슈퍼맨과 배트맨으로 이루어진 무적의 지구평화대, 또는 마이클 조던이 가드를 맡고 매직 존슨이 센터를 맡는 기적의 드림팀을 일구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처음 편집숍이 들어왔을 때의 반응은 꽤나 썰렁했다. 신세계 인터내셔널, 한섬, 제일모직 등 우량 기업들이 일찌감치 유럽, 일본 등지의 편집숍을 벤치마킹해 국내에 오픈했지만 백화점과 보세 매장, 브랜드와 비(非) 브랜드가 머리에 입력된 한국 소비자들의 행태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편집숍 자체의 문제도 있었다. 국내 미유통 하이패션 브랜드에 몰리는 바람에 가격 문턱이 지나치게 높았던 것. 대중은 루이비통 만큼 유명하지도 않으면서 루이비통 만큼 비싼 해외 브랜드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팔릴 만한 아이템보다는 극도로 콘셉추얼하거나 한국인들의 감성에 맞지 않는 옷들이 대다수였다.

천편일률적인 한국 패션에 질린 패션 리더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편집숍은 꽤 오랜 기간 동안 국내 패션 유통의 변방에 머물렀다. 마치 옷이 걸린 갤러리처럼 늘 한적한 편집 매장은 해외 브랜드에 밝은 패션업계 종사자들, 연예인, 그리고 하이엔드 패션 매거진의 전유물이었다.

코인코즈
'돈이 되는' 편집숍의 시작

그러나 편집숍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통의 핵으로 부상했다. 가로수길, 청담동 골목에 깊숙이 박혀 알 만한 사람들만 찾아갔던 편집숍이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적한 골목 대신 유동 인구가 넘쳐나는 백화점의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편집숍들은 가격 문턱을 낮추고 팔릴 만한 옷을 내걸었다.

얼마 전 롯데백화점에 문을 연 는 국내 중견 어패럴사인 보끄레머천다이징이 기획한 편집숍이다. 온앤온과 올리브데올리브로 오랫동안 국내 여성 패션의 맥을 이어온 이 회사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는 대신 편집숍을 택했다.

프랑스, 미국, 스웨덴, 스페인 등 해외 각지에서 들여온 브랜드와 국내 브랜드를 6 대 4의 비율로 구성하고 가격대는 고가 20%, 중고가 20%, 중가 30%, 중저가 30%로 나눴다. 200만 원대 점퍼도 팔지만 물건의 반 이상은 백화점 평균 가격을 밑도는 수준이다.

"지금까지 편집숍은 너무 고가라 접근성이 낮았어요. 하지만 해외 브랜드 중에는 가격도 괜찮으면서 재미있고 독특한 브랜드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동대문 두타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국내 소규모 브랜드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다만 덜 알려졌을 뿐이죠.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이런 걸 원해요."

를 기획한 고태경 부장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편집숍은 가격별로 세분화하는 중이다.

"전통적인 보세 매장도 엄밀한 의미에서 편집숍이에요. 주인이 바이어가 되어 도매시장에서 옷을 셀렉트하니까요. 다만 숍 자체가 브랜딩이 되지 않고 하나의 매장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죠. 고가의 편집숍과 저가의 보세 매장, 그 중간 형태의 편집숍이 이제 나오고 있는 거에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옷이 있으면서 가격도 적절하고, 숍 자체가 브랜드이기 때문에 신뢰도도 갖추고 있죠."

사실 아무리 많이 판다고 해도 편집숍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은 브랜드보다 못하다. 특히 수수료가 높은 백화점에서는 더하다. 그럼에도 너도나도 편집숍 흉내라도 내기를 원하는 이유는 백화점 유통에 대한 권태 때문이다. 백화점은 슈퍼 브랜드들을 앞세워 오랫동안 고급 패션의 대명사 노릇을 해왔다. 선별된 감성을 제시하기보다 안일한 땅 장사에 머물렀던 백화점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극히 공급자 중심의 태도를 유지해왔지만 브랜드 추종이 강한 한국인들에게는 그것도 먹혔다.

그러나 인지도보다 감성에 지불하기를 원하는 요즘 소비자들에게 백화점은 매력 없는 쇼핑 장소다. 초식남, 골드 미스, 유니크 헌터 등 요즘 언론에서 다양하게 명명하는 20~30대의 남녀들은 자기 스타일이 뚜렷해 누구의 조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샤넬을 노땅 취급하고, 이제 막 유명해지기 시작한 해외 디자이너들을 알고 있으며, 마음에 드는 옷이라면 너무 싸든 너무 비싸든 문제 삼지 않는다. 독특한 옷을 찾기 위해 들이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구제 시장과 명품 백화점을 넘나들면서 장소와 브랜드를 초월한 보물 찾기를 즐긴다.

100인의 랩5 독립 디자이너들
문 연지 얼마 안 된 에서 현재 가장 반응이 좋은 상품은 가장 싼 브랜드도 아니고 가장 알려진 브랜드도 아닌 '데이드림 네이션'이라는 영국 브랜드의 옷이다. 대담한 프린트에 오트 쿠튀르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디테일이 들어간 이 옷의 인기에 기획자조차 의외라는 반응이다.

"지금은 소수 패션 리더들만 특이한 옷을 찾는 게 아니에요. 가끔 국내 어패럴 사들이 한국 소비자들을 과소평가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브랜드를 알까, 이런 디자인을 살까, 더 싸야 사지 않을까, 등등으로 고민하지만 소비자들은 이미 어떤 경로로든 그 옷을 구해서 입고 다니고 있어요."

동대문 디자이너들을 깨워라

에 입점한 서른 개 남짓한 브랜드 중 절반을 차지하는 한국 브랜드는 국내 패션계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지금까지 해외 브랜드 중심이던 편집숍에 한국 디자이너들의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자기가 디자인한 옷을 팔려면 그야말로 바늘 구멍을 통과해야 했다. 백화점 입점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서울 컬렉션으로 데뷔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게다가 데뷔를 하더라도 바로 바이어 수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이름 알리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동대문 보세 타운에 자리를 얻거나 다른 디자이너 밑에서 일하다가 가로수길이나 홍대에 자기 매장을 열면 그나마 성공이었다. 이제 이런 이들을 위한 유통 경로가 활짝 열렸다.

8월 15일 명동 눈스퀘어에 오픈한 레벨 파이브는 국내 디자이너 108인의 편집숍이다. 한국 어디에 그렇게 많은 디자이너들이 숨어 있었는지 업계 관계자들에게조차 생소한 라벨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이탈리아 피티워모 최초 참가자인 신재희나 <프로젝트런웨이 코리아>로 얼굴을 알린 최형욱 등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언더 그라운드에서 조용히 내공을 닦아온 '야인 디자이너'들이었다.

압구정동의 편집숍 데일리 프로젝트나 텐꼬르소꼬모에서도 국내 디자이너들의 상품을 일부 매입해왔지만 정욱준, 서상영, 홍승완 등 중견급에 속하는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에 그쳤다. 개인 또는 소규모의 독립 디자이너 브랜드가 명동 핵심 상권 또는 대형 백화점에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옷을 판 사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의 국내 브랜드 중 6개는 단순히 바이어 수주를 받는 것을 넘어서 를 위한 제품을 따로 디자인한다. 이들은 기존 편집숍의 맹점이던 속도를 보강하는 주역이다. 1년에 2번의 바잉으로 늘 정체될 수밖에 없는 편집숍에 빠른 속도로 계속 새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다.

"코웍 브랜드들과 2주에 한번 꼴로 미팅을 합니다. 우리가 배기 팬츠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들은 우리를 위해 디자인을 하죠. 1주일도 안 돼서 옷이 나오고 리오더는 2~3일이면 충분해요. 의 인원은 겨우 4명이지만 6개 업체의 디자이너를 모두 합하면 50명이 넘어요. 이들이 의 디자이너인 셈입니다. 한국형 편집숍인 동시에 한국형 SPA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지금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에 속속 자리잡고 있는 편집숍은 한국 소비자들이 한국 디자이너들의 옷에 주목할 기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의미하다. 개인의 감성보다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휘둘렸던 한국 패션계에 독립 디자이너들의 설 자리가 생기고, 그들의 감성을 자국민들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인정하는 것은 정체성을 갖춘 패션 강국으로서 제일 먼저 밟아야 할 수순이다.

한국 디자이너들이 편집숍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으나 이것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어떤 글로벌 패션 프로젝트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