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정선 단임골

오대천변의 비경인 막동폭포
강원도 진부에서 정선을 잇는 국도 59호선(속칭 59번 국도). 털털거리던 비포장도로였던 시절, 처음으로 이 길을 따라갔다. 양옆으로 병풍처럼 드리운 고산준봉을 거느린 채, 뱀처럼 구불거리는 오대천과 줄곧 손잡으며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그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남은 청정 하천 가운데 하나로,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디맑은 물을 자랑했다. 너비가 좀 넓다뿐이지 깊은 산중 계곡이나 다름없었고 막동폭포, 장전계곡 등의 비경도 품었다.

그러다가 오대천 맑은 물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먼지 폴폴 날리는 흙과 자갈을 아스팔트가 덮으면서부터다. 도로가 포장되자 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방도 405호선은 국가지원지방도 33호선으로 승격되었고 곧 이어 국도 59호선으로 다시 격상되었다. 길도 사람처럼 지위가 높아질수록 초심을 잃고 탁한 세파의 유혹에 휩쓸리기 쉬운 것인가.

이 길 따라 흐르던 오대천은 관광객들의 사랑의 대가로 순수성을 내놓아야 했다. 한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물고기들의 산란탑은 래프팅 보트 아래 무참하게 허물어졌다. 그러나 '오대천 비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수중 생태계는 아랑곳없었다.

오대천으로 흘러들어가는 30리 심산유곡

단임골의 토종꿀 치는 모습
평창군 경계를 벗어나 정선군 땅으로 들어오고 나서 5킬로미터 남짓한 지점, 왼쪽에 걸린 숙암교를 건너면서 그나마 덜 다친 자연에 나그네는 위안을 얻는다. 여기서 좌회전해 2킬로미터 남짓 가면 소나무터와 큰터(대기) 마을을 지나 단임골 초입에 다다른다.

이곳은 본디 가을 단풍 숲이 고와 단림골(丹林谷)이라고 했다가 발음하기 어려워 단임골로 바뀌었다. 때로는 듬성듬성 놓인 바위 사이로, 때로는 골짜기를 꽉 메운 집채만한 바윗덩어리 사이로, 하늘빛을 받아 더없이 푸른 물이 이리저리 굽이돌아 돌돌 흐르는 계곡이 있어, 단임골 가는 길은 언제나 정겹다.

단임골은 고깔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지형에 들어앉은 골짜기다. 1200~1300미터급 준봉들이 빙 돌아 둘러치고 있다. 그 높은 봉우리들이 박지산(1394미터)을 빼고는 마땅한 이름조차 갖지 못한 것은 이곳이 얼마나 소외된 오지인지를 반증한다.

단임골은 무명의 1341미터 봉우리 남쪽 기슭에서 발원해 30리 가까이 흘러내리다가 큰터에서 오대천과 인사를 나누는 심산유곡이다. 그 중간에 장재터와 우동골에서 내려온 계류를 받아들이면서 계곡의 아름다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근래 들어 피서객들이 종종 찾아들지만 민박집들이 있는 하류 쪽에서나 외지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하룻밤 신세졌던 안단임의 마지막 민가

단임분교는 1989년 폐교되었다
숙암교 건너 약 8킬로미터. 서너 개의 다리를 건넌 뒤 바깥단임에서 폐교된 학교와 만난다. 1965년 8월에 문을 연 북평초등학교 단임분교는 18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89년 3월, 폐교의 운명을 맞이한다. 한동안 버려졌던 낡은 목조 교실은 최근 외지인이 사들여 단장하고 단임헌정(丹林軒亭)이라는 문학당으로 운영하고 있다.

단임골은 건강을 회복하기에 그만인 곳이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숲 좋으니 병을 앓을 일이 없다. 그래서 어느 귀순 용사는 전국을 샅샅이 뒤진 끝에 이 마을에 정착하기도 했다. 바깥단임, 우동골, 장재터, 안단임 등으로 이루어진 단임골에는 한때 60여 가구가 모여 살았으나 하나하나 도회지로 떠나 이제는 10여 가구가 남았을 뿐이다.

바깥단임에서 약 2.7킬로미터. 계곡 위로 걸린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안단임의 마지막 민가가 나타난다. 약 20년 전 몇몇 지인과 함께 찾았을 때 그 집에는 김완택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족은 그 후 저 아래 숙암 마을로 내려갔고 이제는 다른 사람이 벌을 치며 살고 있다.

그와의 만남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캄캄한 밤이었다. 밤하늘에는 여백 하나 없이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서울 하늘엔 별이 없다'는 말을 그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밤하늘에 이토록 별이 많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부엌의 둥근 나무 탁자에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당시만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과 손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허기진 배를 채우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엌 한쪽에서 황소가 이방인들을 멀뚱멀뚱 바라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단임분교는 최근 문학당으로 변신했다
"여기는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춥지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집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게끔 집을 설계해야 합니다. 부엌과 방, 방과 방이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지요. 물론 외양간도 부엌 한쪽에 딸려 있습니다. 쇠죽 쑤기에도 편하지만 소가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더 좋지요. 소도 한가족 아니겠어요?"

황소의 굵은 눈빛을 뒤통수로 받으며 쑥스럽게 식사하던 우리는 붉은 머루술이 목구멍을 따스하게 적시자 그깟 시선 따위는 곧 잊었다. 집주인이 손수 담근 달콤하고 진한 머루술은 피로에 지친 심신을 녹이고도 남았다. 술에 약한 순서로 하나하나 곯아떨어졌으나 우리 모두는 이튿날 새벽안개 속에서 벌떡 일어나 산뜻한 새아침을 맞았다.

찾아가는 길

진부 나들목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정선 방면 59번 국도를 따라간다. 27km 남짓한 지점에서 왼쪽 숙암교를 건넌 다음 좌회전, 10.8km 가량 가면 안단임이다. 대중교통은 진부나 정선에서 버스를 타고 숙암리에서 내려 3시간쯤 걷는다.

맛있는 집

부일식당의 산채백반
오가는 길에 진부의 산채백반을 맛보자. 더덕, 두릅, 고사리, 도라지, 취나물, 버섯 등을 천연 양념으로 조리해 산나물 특유의 향긋한 맛을 살려 입맛을 돋운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양념한 두부도 일품이다. 여러 집 가운데 부일식당(☎033-335-7232)과 부림식당(☎033-335-7576)이 유명하다.



글∙사진 신성순 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