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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꽃 술에 창건… 전설의 고찰

[테마여행] 봉화 청량사
소박한 찻집 '안심당', 종이로 만든 약사여래상, 금잔화 꽃 바다 눈길 끄네
  • 봉화 청량사 전경
산사 여행이 가장 어울리는 이즈음, '가을 청량사'란 별칭을 얻을 만큼 가을 정취가 유별하다는 봉화 청량산 깊숙한 골에 자리한 청량사로 황금빛 가을을 찾아 바람결을 앞세우고 나무들의 수런거림을 추임새 삼아 발걸음에 힘을 싣는다.

일주문을 들어서 한창 고운 빛깔을 품은 울창한 수림 사이의 조붓한 길을 걷노라면 길섶에 올망졸망하게 서있는 돌탑들이 풀어지고 늘어지는 마음결과 걸음걸이를 다독인다.

정성스런 손길로 잘 다듬고 열어 낸 수로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물길에서 나직히 울리는 물소리와 간간히 불어오는 산바람은 흐르는 땀과 가뿐 숨결을 재운다. 그렇게 휘적휘적, 익어가는 가을 숲길에 걸음이 익숙해질 즈음, 청량사의 고아한 자태가 눈앞에 드러나며 투명한 햇살을 이고 있는 절집 앞 다실, 안심당 마당에 닿는다.

안심당은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청량사를 찾아 든 이들의 시선과 발길을 붙잡는 소박한 찻집으로 주지스님의 포교실이자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감로수 같은 곳이다.

잠시 찻집 마당을 서성이며 새어나오는 차향을 좇거나 차향보다 더 짙고 향기로운 청량사 주지스님의 나눔의 실천과 세상을 향한 사랑에 취한 채 발아래 놓인 만산홍엽의 산등성이와 눈이 시리게 푸르른 하늘에서 농담을 달리하는 구름과 맞닿은 청량사 도량을 더듬어본다.

  • 청량사 수로
담도 없고 문도 없는 청량사 경내로 성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달디단 샘물이 반긴다. 찰랑찰랑 수구를 채운 맑은 물은 가을 산행으로 인한 갈증을 해갈할 반가운 마중물이 된다. 그리고 뽀르르 뽀그르.. 방울지며 솟아오르는 물소리의 영롱한 울림이 산사의 뜰을 적시며, 기척도 없이 수면에 내린 햇빛이 걸어놓은 여리한 무지개가 물가를 서성이는 이들의 얼굴마다에 아롱진다.

금새 샘물터는 서로 나눈 한잔 물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돼 올라야 할 청량산을 잠시 접어둔 채 속닥하니 정담을 즐기는 풍경이 된다. 그리고 어느새 맑은 샘물과 햇살과 목어의 미소가 버무려져 청량사의 몽글몽글 고운 빛깔, 그윽한 추억으로 저마다의 가슴에 인화된다.

절집 마당 돌계단을 올라 까마득한 절벽 위의 탑 앞에 서니 거침없이 드나드는 바람이 왕왕, 위협적인 소리까지 내며 온 몸을 휘감는다. 그러나 사방이 훤히 열려진 허공인 이 높은 곳에서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더 먼저 닿는 것일까?

바람의 위세에 맞서 꼿꼿이 서 있는 석탑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건만 그저 발치에서 진경의 눈 맛만 쫓는 무심과 무례를 나무라듯 거센 바람 한줄기가 와락 밀려들었다. 후다닥! 애써 무렴함을 감추려 총총걸음으로 탑을 벗어나 청량사의 주불인 약사여래불을 만나러 유리보전으로 향했다.

풍수지리상 삼각우총의 전설이 깃든 연꽃의 꽃술에다 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을 비롯해 수많은 환란과 풍상, 그리고 지난하고 고단한 역사의 격랑을 견디느라 1000년 전의 대찰의 모습은 가늠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리보전은 비록 단청이 바랬고, 휘어진 기둥과 들보는 시간의 힘에 갈라지고 터졌지만 강건하게 지켜 온 청정도량의 면모 그대로 순정하고 고풍스런 고찰의 품위가 깃들어 있다. 더구나 '유리보전' 이라 쓰인 공민왕의 친필 편액 또한 본디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 유장미를 더한다.

  • 지불 여래상이 있는 유리보전
그리고 무엇보다 긴 시간이 지워버린 휘황한 신라 고찰의 자취 대신 종이를 녹여 만든 유일의 약사여래상 지불(紙佛)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 무탈하게 보존되어 있어 청량사의 유유함을 전한다. 그럼에도 법당에 들어서 금빛 찬란하게 화현한 약사여래불을 배알하고 돌아서는데 명치끝이 얼얼하고 알싸함이 밀려들며 발걸음을 부여잡는다. 황금불을 모시기엔 유리보전의 지극한 소박함이 오히려 청량사가 지닌 깊은 상처를 선연하게 한다.

소슬한 산바람이 감도는 유리보존 앞마당을 지나쳐 낮은 담장 너머 심검당을 곁눈질하는데 엄중한 독경과 강론소리 대신, 어느 스님이 도반과 차를 나눴는가 보다. 평상에 다소곳이 놓인 찻잔에는 차향 대신 포실한 햇살이 한가득 남실거리고, 볕 잘 든 툇마루에 널린 빨간 고추가 청량사 도량에도 일상의 삶이 지속되고 살가운 사람살이의 온기가 머무는 곳임을 알린다. 잠시 엿본 심검당의 정겨움으로 뭉근히 피어나는 전경이 따사롭다 .

누가 풍경은 바람의 소리라고 했다. 댕그렁 댕그렁 심검당 처마끝을 스치는 바람이 울려대는 맑은 풍경소리를 길라잡이 삼아 담 모롱이를 돌고 나무계단을 올라 청량사의 뒤란, 숨겨진 금잔화 꽃바다가 있다는 산신각 앞에 서는 순간, 낭창낭창 청량사 도량을 휘젓던 발걸음은 미동도 않는 돌부처가 된다. 그리고 이내 시선이 닿고 머무는 곳곳에 온통 눈부신 황금빛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한, 지천이 샛노란 금잔화 꽃무더기의 장관에 탄성 대신 마른침만 삼킨다.

청량사 금잔화 꽃바다는 청량사 산신각 뒷편 능선 대숲자락에서부터 시작해, 올망졸망 자리한 돌탑과 석조물 틈새를 촘촘히 메우고 산신각을 둘러치며, 심검당 지붕을 뒤덮는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햇살 따라 서로 다투어 내밀던 꽃송이들은 색을 바꾸고, 바람결을 따라 일렁이다 심검당 가뭇한 기와지붕으로 꽃물결을 이루고 번져가며 황금빛 꽃물을 들인다.

하염없이 만개한 금잔화의 향연에 알알하게 만취한 마음을 수습하며 산신각 아래로 내려서려는데, 저만치 양지바른 언덕에 가을볕바라기에 여념이 없는 장독대가 보인다. 하마 항아리 속에서 곰삭는 먹거리들도 금잔화 꽃물을 들이려는 것일까? 부지런한 공양주 손길에 반짝반짝 윤기 나는 항아리들의 틈새마다에도 황금빛 금잔화 꽃무더기가 한아름씩이다.

청량사 가을꽃 금잔화에 취한 할랑한 걸음새로 가랑거리는 낙엽 소리를 장단삼고 발자국을 세어가며 일소당을 거쳐 다시 안심당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내려선다. 나무로 이어 놓은 오솔길은 점점 도량을 벗어날수록 청량산의 진한 수림향이 스미고, 나무사이를 오가는 산새들의 날개짓으로 고요 대신 생생한 활기가 넘는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안심당 문 앞이다.

그제서야 청량산 높고 깊은 산자락을 휘도느라 온 몸에 절어버린 한기와 노곤함이 스믈스믈 달겨든다. 내쳐 다실로 들어서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 들창가를 찾아 한기를 재울 금국차 한잔을 받았다. 그리고 맑고 향기로운 차향을 우려내며 바람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들어섰던 가을 청량사의 비경과 아름답던 가을여행의 추억을 추스린다. 들창너머로 이우는 햇살 아래 구름이 짓는 산문, 청량사 고운 모습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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