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철 재료로 만든 프렌치 & 이탈리안

서울 경기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소 트루에서는 파스타와 피자를 판다. 그런데 덮밥도 있고 샌드위치도 있다. 그리고 떡볶이도 있다. 여기는 도대체 무슨 음식을 파는 식당인가?

"레스토랑을 일식, 한식, 프랑스식으로 구분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자국민들이 지금 가장 좋아하고 즐겨 먹는 음식을, 지역에서 난 건강한 식재료로 정성 들여 요리하는 것, 컨템포러리 퀴진(contemporary cuisine)이 전 세계적인 트렌드에요."

소 트루의 오너 셰프 최지영 씨의 말이다. 스파게티가 밥처럼 익숙해지고 짬뽕과 초밥에서 아무런 이국의 향기도 맡을 수 없게 된 것은 한국 다이닝 씬이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쉴새 없이 들어오는 외국 음식들, 점점 친숙해지는 타국의 향신료들, 변하는 입맛. 이 모든 변화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지금의 한국 음식'이 바로 코리안 컨템포러리 퀴진이다.

"컨템포러리 퀴진은 이탈리안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중식이 될 수도 있어요. 물론 한식이 될 수도 있고요. 중요한 건 이 땅에서 나는 건강한 제철 재료로 만든다는 거에요. 가끔 양식을 먹을 때 본토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음식은 '감정적'인 것이라 당시의 기분, 이국의 공기, 그 땅의 성질까지 모두 맛에 영향을 미쳐요.

그 나라의 재료를 그대로 가져와서 여기서 만든다고 해도 그 곳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는 거죠. 식재료의 유통과정이 너무 길어질 경우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도 고려해야 할 문제고요."

외국의 음식에 한국의 문화가 섞인다는 점에서 퓨전 음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퓨전이 '섞임'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늘 정체성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컨템포러리는 '시간과 공간'에 집중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들, 여기에 셰프의 정성과 양심, 철학을 듬뿍 담았다. 지역, 유행, 기후, 문화, 입맛 중 아무것도 거스르지 않는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음식이다.

오너 셰프, 유대감, 건강 또 건강

음식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갖는 관심사의 총 집결체다. 지금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다. 최근 프리미엄 버거집을 연 한 셰프의 말에 따르면 월급 150만 원을 받는 사람들도 마켓오를 사먹는 시대다.

양심적인 농부와 축산업자들에 의해 깨끗하게 길러져 신선하게 보관된 이 땅의 식재료를 먹고자 하는 마음은 국산품 애용을 외치던 80년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지극히 개인적이고 탐욕스런 바람이다.

여기에 아늑한 공간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조금씩 여유롭게 즐기고자 하는 욕구가 추가된다. 이 모든 키워드를 정확하게 만족시키는 것이 바로 오너 셰프 레스토랑이다.

지금 한국의 번화가 곳곳에는 외국 또는 국내의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고 5~10석 내외의 작은 식당을 연 오너 셰프 1세대들이 활약 중이다. 그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각국의 요리 기술을 한국 식재료에 자유자재로 적용하며 창의적인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영업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자존심을 걸고 재료의 질을 지키며 손님들의 만족을 유일한 보상으로 삼는다.

약 한 달 전 남산 근처에 오픈한 탤런트 김호진의 레스토랑 샤야 99는 4층짜리 건물에 각 층마다 거의 테이블 하나씩만 놓았다. 작은 정원, 은밀한 공간은 업소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듯한 안정감을 준다. 음식은 베이컨을 올린 녹두전, 제육볶음으로 속을 채운 쿼사디아, 열무를 곁들인 스테이크 등 완벽히 국적불명이지만, 재료 맛이 살아 있는 음식 앞에 국적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한국식 프렌치나 한국식 이탈리안은 물론이고 한식도 컨템포러리 퀴진에 포함된다. 이 경우 '한국식 한식'이 아닌 '오늘의 한식'이 된다. 한식 세계화를 위해 기업이나 요리사가 의도적으로 바꾼 한식이 아닌, 나날이 바뀌는 한국인들의 입맛을 자연스레 반영한 오늘날의 음식이다.

이 세계에서 구절판과 매작과는 뒷줄로 물러나야 하고 오히려 김치찌개와 비빔밥, 제육볶음이 앞줄에 서게 된다. 이름마저 '근본 없는 놈'인 치킨과 아무 요리 기법도 필요 없는 '단순한 놈' 삼겹살도 컨템포러리 퀴진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셰프의 창의성과 신선한 재료가 더해진다면, 한식 세계화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음식은 없다.

농장에서 갓 따온 자연 – The green table 더 그린 테이블

농장에서 갓 따온 자연 - The green table 더 그린 테이블
서래마을 더 그린 테이블의 메뉴에는 재미있는 단어들이 올라와 있다. 버섯 덕셀, 대하 스터핑, 호박 퓨레, 글레이즈드 당근, 오디 타르트 등등. 콩피(고기를 기름에 재워 낮은 온도에서 익히기), 수비드(저온조리법), 퓨레(삶아서 으깨 체로 곱게 치기), 폼(거품 내기), 젤리(젤라틴을 넣어 겔화 시키기) 등 프랑스 주방에서 흔히 쓰이는 테크닉이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 이름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프랑스 음식이 너무 좋아서 배우기는 했지만 프랑스에서 일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한국에서 한국의 식재료를 가지고 한국인이 만들 수 있는 프렌치가 무엇일까 고민했죠." 더 그린 테이블의 주인인 김은희 셰프는 20대 중반에 음식을 배우기 위해 불현듯 미국으로 날아갔다. CIA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두 명의 언니와 식당을 열었을 때 그녀의 머리 속을 채운 바람은 단 한가지였다. '우리 땅에서 자란 건강한 식재료로 식탁을 가득 채우고 싶다'.

자매들은 당장 농장 투어를 시작했다. 프렌치 요리에 접목시킬 수 있는 신선한 재료들을 찾아 다닌 것. 남해 문어, 가평 아오리 사과, 지리산 청매실, 제주도 한라봉 등등. 지금 더 그린 테이블에서 나오는 과일은 그들이 직접 농장에서 따온 것들이다. "아오리 사과가 가장 맛있을 때는 풋풋한 녹색에서 2~3주 정도 지나 약간 붉은 기운이 돌 때에요. 이때 따서 바로 만들어야 최고죠. 유통되는 과일은 아무래도 조금 설익었을 때 딸 수밖에 없잖아요." 발품 팔아 획득한 식재료들은 기존의 용도를 벗어나 새로운 음식으로 변형된다.

죽순으로 만든 피클, 참나물을 넣은 파스타, 올리브 오일에 볶은 싱싱한 시금치. 신선한 재료에 프랑스의 미학적 테크닉이 더해진 음식들은 '가치 소비'라는 작금의 소비 행태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돈이 아깝지 않다는 소리다. 김은희 셰프의 꿈은 자신의 농장을 갖는 것이다. 가능하면 모든 재료를 자기가 보는 앞에서 길러 주방으로 나르고 싶다.

채식, 생식, 자연식 – So true 소 트루

점점 더 헬시 푸드에 집착하고 있는 뉴욕에서 채식 다음으로 주목 하고 있는 것은 생식이다. 소 트루의 오너 셰프 최지영 씨는 한국 유일의 '생채식 연구가'로 알려져 있다. 아직 채식도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한국에서 생식은 너무나 생소한 영역이다. 때문에 그녀가 지난해 소 트루를 열었을 때 그녀는 굳이 채식, 생식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식당에는 해산물 짐발라야도 있고, 치즈를 넣은 피자도 있다. "유기농이다. 로컬 푸드다 하는 말들이 꼭 건강함을 보장하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요리하는 사람의 양심을 걸고 좋은 재료에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하느냐죠." 그녀는 이틀에 한 번 재래시장, 마트, 백화점을 헤집고 다니며 건강하게 기른 닭의 가슴살, 프로볼로노 치즈, 현미, 견과류 등을 사가지고 온다. 잼도, 빵도, 요거트도 모두 직접 만든다. 채식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채식 손님을 대환영하는 분위기다.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음식에서 고기를 빼주는 건 물론이고 녹차 라떼의 우유도 두유로 교체하는 세심함을 발휘한다. 비건(vegan: 유제품도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메뉴도 있다. 마와 찹쌀을 갈아 치즈를 대신한 채소밭 피자는 어린 시절 어떻게든 야채를 먹이기 위해 갖은 꼼수를 부리던 엄마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몸에 좋은 채소를 가득 얹었다. 음식 외에 소 트루가 자랑하는 것은 체인점 커피 가격으로 바리스타가 만든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케나 AA TOP,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멕시코 알투라를 비롯해 8개의 커피가 있다. 식사를 한 손님들에게는 커피 가격을 20% 할인해 준다.

밑반찬 나오는 이탈리안 – Bon palate 봉 파레트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는 말은 일종의 페이크죠." 성북동 봉 파레트의 오너 셰프 권태우 씨는 자신의 식당을 '양식당'이라는 말로 정의했다. 피자와 파스타, 리조또,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이지만 이탈리안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제대로 만든 미트볼이나 본토식 피자 도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셰프로서의 그의 고집은 '내가 잘하는 요리보다, 손님이 원하는 음식을 잘 만드는 것'이다. 힘을 뺀 자리에 배려를 채운 결과, 봉 파레트에는 한국의 식문화와 감성이 가득하다.

주문을 하면 일단 밑반찬이 깔린다. 샐러드, 말린 토마토, 발사믹에 졸인 청양고추, 수프, 빵, 마늘 버섯 졸임 등이다. "빵과 피클만 달랑 드리고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죄송해서요. 셰프가 모든 요리를 다 하니까 손님이 몰릴 경우 조금 기다리게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홀 매니저 고기성 씨의 말이다.

음식의 양도 푸짐하다. 살짝 부족한 듯이 먹는 것보다는 조금 남은 음식을 보며 포만감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네 습성을 고려한 것이다. 손님들이 크림 리조또를 느끼하게 여기면 하프 크림으로 바꾸고 드물게는 공기밥을 달라고 하는 손님에게 밥을 제공한 적도 있다.

"처음에 콘셉트가 가정식이었어요. 기본적으로 해산물, 육류, 가금류 등을 갖추고 있는 집에 손님이 놀러 왔을 때 그 분 입맛에 맞게 뭐든지 해드리는 그런 식당이요." 테이블 5개가 놓인 공간은 우연치 않게 한옥으로 꾸며져 있다. 손님들은 자기 집처럼 먹고 싶은 음식을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예쁜 수저 세트를 발견하면 사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10월 말에는 악기 콜렉터인 홀 매니저의 공연도 열릴 예정이다. 가격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도축한 지 2주 됐을 때 들여온 1등급 한우로 만든 스테이크가 3만 원대다.

투데이스 코리안 퀴진 – Bistro Seoul 비스트로 서울

매드포갈릭, 토니로마스 등을 보유하고 있는 레스토랑 기업 썬앳푸드가 올해 초 한식 세계화를 선포하며 삼성동 오크우드 호텔에 비스트로 서울을 열었다. 기업에 의한 성공 사례가 아직 없던 터라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지만 비스트로 서울은 첫 해외 지점을 내기도 전에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최고의 한식당으로 꼽히고 있다.

비스트로 서울이 처음 출범하면서 내세운 것은 '투데이스 코리안 퀴진(Today's Korean Cuisine)'이다. "매운 맛을 선호하던 한국인들이 조금씩 단 맛으로 기우는 경향이 뚜렷해요. 제 3국의 음식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이고, 애피타이저 등 서구의 식문화에도 낯설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메뉴 개발을 도맡았던 최현정 팀장은 아무도 먹지 않는 한식보다는 지금 가장 사랑받는 한식으로 진출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 한국인들의 입맛 변화 추이를 신중하게 살폈다.

밑반찬 나오는 이탈리안 - Bon palate 봉 파레트
그 결과 타이 누들을 사용한 냉채, 고소한 일본식 깨 소스를 사용한 삼겹 편채, 그리고 한치에 이탈리아식 요리법을 가미한 한치 카르파치오 같은 메뉴를 만들었다. 여기에 전통 된장, 담양에서 공수한 최고급 돼지 목살, 자연에서 숙성한 약고추장, 설탕 대신 천연 과즙 등 까다롭게 재료를 선정해 기본기에 충실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은대구 조림과 와규 갈비찜 앞에서 한식의 정체성에 대해 논하는 이들은 없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쿄에 첫 해외 지점을 열 예정이다.


투데이스 코리안 퀴진 - Bistro Seoul 비스트로 서울
채식, 생식, 자연식 - So true 소 트루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