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보성 녹차밭58만여 차나무 장관… 찻잎이 전하는 풋풋한 생기 충만
저무는 한 해를 앞두고 어지러운 마음결을 정돈하고, 지워지는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초록이 만연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
닫혀진 공간을 맴도는 일상의 지루함을 털고, 한겨울임에도 마음껏 초록빛을 탐닉하며, 생명력의 지속성을 확인하면서, 한결 가뿐해진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충전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50만평 규모의 전라남도 보성의 대한다원은 국내 유일의 녹차 관광농원으로, 아름다운 차밭 전경을 찾는 관광지로, 생산되는 차의 빛깔과 향, 맛이 일품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다원을 만나기 위해 입구에서 삼나무가 열을 지어 호위하는 조붓한 길을 걸으면 개운한 나무향이 코끝에 살픗 다가서며 침침했던 마음엔 청량감이 살아오른다. 가벼운 걸음새로 나무 사이를 넘나 들다 보면 금새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히며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마치 봄날인 양 계절을 착각하게 한다.
차밭 고랑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초록이 주는 평안함과 찻잎이 전하는 풋풋한 생기가 그윽하다. 수줍게 속살을 내민 여린 잎새는 간간이 스치는 바람에 산들거리고, 꽃술을 열어 놓은 차꽃은 하얀 꽃색을 닮은 맑고 그윽한 차향을 낸다.
흙을 밟으며 차밭 능선을 오르자 차나무 모둠 사이마다 초록길이 열려 있다. 삼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산들한 바람이 흐르는 길,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살이 녹아드는 볕이 머무는 길, 찻잎 따는 고운 손길이 스치던 향기가 남실대는 길. 그리고 이 겨울에 초록을 찾아 온 이들이 몸과 마음에 흠씬 초록을 물들이며, 은은한 차향에 젖는 사람의 길이 나란히 이어지며 줄을 짓는다. 그래서 이따금씩 차밭의 가느다란 고랑마다에서는 관람객들이 날리는 투명하고 청량한 찻물을 닮은 웃음소리가 날아오른다.
차밭 중간에 자리한 전망대는 관람객의 지친 걸음을 쉴 수 있는 쉼터이자 차밭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라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댄다. 탁 트인 시야로 보이는 차밭 전경에 또 다시 시선을 홀렸다.
전망대에서 오른쪽 산책로는 비슷한 자세로 차밭에서의 추억을 사진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관람객들의 줄이 부드러운 차나무 결을 따라 이어진다.
그제서야 차밭의 본디 모습인 고즈넉함이 깃들고, 한숨 돌린 전망대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가 나른한 제 몸을 대신해 그림자를 길게 눕힌다. 무심히 지나쳤던 정갈한 길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차밭 곳곳이 정성 가득한 손길로 일구고 다듬어 덖어낸 차맛을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바다가 보인다는 산꼭대기의 또 다른 전망대는 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능선을 따라 올라야 한다. 그곳은 아득히 보이는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며 제 모든 것을 활짝 열어 보여주는 차밭의 호젓한 정취를 담았다.
오호라! 푸르름이 물결치는 초록의 바다로구나.
기웃한 겨울 햇살이 빠르게 다가와 중간에서 반환점을 잡았지만 겨울속 초록빛을 찾아 나선 여행은 생기 충만했다. 어느 곳도 기울거나 모자람 없이 공평하게 한 줌씩 뿌려주는 햇살을 받으며, 너른 차밭 곳곳을 휘감돌던 그윽한 차향에 취한 채 더없이 그리웠던 영롱한 초록의 넘실거림을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기념품점에 들러 찻잔 두어개를 골랐다. 하나하나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지닌 작은 찻잔이지만 한겨울에 찾은 보성 차밭을 추억하기엔 충분하다. "이 꽃도 기념으로 가져 가세요. 며칠은 괜찮을 거예요." 다기를 싸던 젊은이가 옆에 놓인 하얀 차꽃을 찻잔과 함께 싸며 맑은 미소를 짓는다. 부디 찻잔에 젊은이의 마음처럼 고운 찻물이 들었으면 좋겠다.
보성은 이곳 차밭뿐만 아니라 주변 곳곳에도 많은 차밭이 산재해 있다. 그러니 보성의 차밭을 찾는 이들이 모두 차를 좋아하고 차 문화를 즐기진 않더라도, 아름다운 차밭 풍경이라도 감상할 기회가 된다면 긴 역사를 지닌 우리의 차 문화를 이해하며 차가 지닌 풍미를 엿볼 수 있지는 않을까.
"참 좋네. 엄동설한에 초록색 녹차 바다속을 헤엄쳤더니 너무 상쾌해. 흰눈 내릴 때 오면 더 좋겠지?"옆에 있는 일행이 건네는 차밭 여행의 감상이 혼자 생각의 우물에 갇혔던 나를 화들짝 깨웠다. 그제서야 제자리를 맴돌던 마음이 걸음을 다독이고, 푸른 희망의 물이 오른 가슴을 느슨해진 목도리를 감아매듯 둘둘 말아 여몄다. "하마 그럽시다. 우리 겨우내 싱싱한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봄날 같은 가슴으로 늘 푸른 차나무 같은 희망을 품고 삽시다."
글·사진=양지혜 여행작가 himei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