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벌교 대포리태백산맥 소설 속 생존 위한 노동의 터전 더듬는 갯벌 체험

벌교 대포리 선착장
태백산맥이란 소설이 손짓했고, 그래서 언제나 상상으로 그리며 남도 여행길엔 반드시 찾겠노라 벼르고 벼르던 벌교 갯벌. 이념의 회오리 속에서 지난한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 아직도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뻘 위를 누비며 삶을 잇고 있어 서러움과 비릿한 아픔이 갯벌의 뻘처럼 끈적일 것이란 어설픈 선입견을 지니고 들어섰다. 그러나 벌교 읍내는 항상 마음으로 그렸던, 허상을 좇는 열망에 비례한 '실망'이란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한 여행이었다.

곧 내려앉을 듯 무겁기만 하던 하늘에선 눈과 비가 뒤엉켜 내리고, 읍내 도로변은 우중충한 하늘빛을 놀려대듯 울긋불긋하고, 건물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즐비하게 나열한 '꼬막요리 전문점'이란 간판들이 현란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소설이 주던 무겁고 진한 감동 대신 피식 웃음을 짓게 했지만, 그렇다고 세태의 아이러니와 헛헛한 모습만으론 그동안 벼르던 벌교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잡고 읍내 둘러보기는 그만 두고 내쳐 대포리 포구로 달려가 갯벌을 마주했다. 그리고 오가는 데 4시간이 걸린다는, 바다이기도 하고 땅이 되기도 하는, 저 넓은 벌교 갯벌, 벌교 꼬막밭이 품은 얘기를 쏟아지는 진눈개비 사이로 서둘러 담고 확인하며, 출렁이는 소설 속의 장면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리 포구에서 바라보는 망망한 갯벌은 적막감과 황량함만 가득해 잠시 전에 보았던 벌교읍내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벌교 갯벌의 뻘배
더구나 왁자지껄, 꼬막을 캐러 나가는 여인네들의 진한 남도 사투리 속 질펀한 수다와, 고단하고 치열했던 생존을 위한 노동의 터전이던 소설 속의 흔적 대신, 여리하게 새겨진 어지러운 물결 자국과 뻘배가 열어 놓은 가느다란 물길만이 바닷물이 밀려난 물렁한 육지, 벌교의 갯벌임을 알린다.

난분분한 눈송이는 한순간에 빗방울로, 그리고 다시 매운바람 한줄기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싸락눈으로의 변신을 거듭하더니 하늘과 갯벌의 경계를 지워갔다.

눈송이 너머로 고단한 노동에 동행 했던 뻘배가 주인을 기다리며 얌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 꼿꼿이 서서는 절대 탈 수 없는, 한쪽 무릎마저 꿇어야만 하는 뻘에 대한 겸손과, 칼날 같은 겨울뻘을 헤쳐 나가야 하는, 누구도 한쪽다리의 고통 없이는 탈 수 없다는 뻘배. 쉼을 누리는 순간마저도 질펀한 뻘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 땅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박혀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문득, 도무지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 아득한 곳, 드넓은 뻘에 시선이 멈춰진다. 살을 에는 추위에 하얀 맨살로 푹푹 빠지는 뻘을 헤집어가며 하루의 생을 버티기 위해 깊은 상처와 지워지지 않을 짙은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삶을 힘겹게 밀어가는 소설 속 그녀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울컥! 내마음은 붙박이가 되었는지, 갯벌에서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고 비칠비칠 맴맴 뻘밭만 돌고 돈다.

대포리 잿빛 뻘밭
겨울바다의 칼바람 탓이라고 알싸해지는 코끝과 뜨끈해지는 눈두덩이를 감추며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거의 닿을 무렵 거세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눈송이는 이내 빗방울로 바뀌고, 토닥토닥, 툭!툭! 제법 큰소리까지 내며 겨울 갯벌의 정적을 깨운다. 평안을 주는 빗방울의 울림에 한결 여유롭게 등대를 지나 선착장 이곳저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양식장을 넘나들던 배들이 폭풍과 물때로 움직임이 묶인 채 무료함을 달래느라 만선을 기원하며 매단 색색의 깃발을 펄럭인다.

뱃전을 따라 휘도는 사이 서서히 빗방울이 잦아들더니 비가 그쳤다.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무심 무량한 뻘밭에서 일어나는 재밋거리가 시선을 붙잡았다.

어디서 나왔는지 갓 부화한 어린 게들이 시커먼 뻘을 뒤집어 쓴 채 열을 지어 종종종 갯벌을 휘젓는다. 그때마다 말랑한 뻘 위엔 작은 점점의 수가 놓였다.

한결 개운해진 시선으로 광활한 뻘 위에 새겨진 두 줄기의 커다란 뱃길을 응시한다. 부드럽고 말랑한 흙의 느낌과 독한 소금기를 품은 차디찬 바닷물이 범벅이 된 육지와 바다의 경계이자, 두 곳을 모두 어우르고 품은 배들만의 해방구인 갯벌 위의 뱃길. 세찬 바람과 거센 파도에도 부서지지 않고, 유유한 시간 속에서 시시때때로 켜켜이 쌓이는 뻘에도 묻히지 않은 갯벌의 두 갈래 물길을 보며 나만의 남다른 벌교여행 감흥에 젖었다.

뱃길에 정신을 놓은 사이, 갯벌은 곧 바닷물이 일렁이며 밀려 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듯 서서히 밑에서부터 물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어지럽던 물새들의 발자국이 지워지며 갯벌은 윤기를 더하면서 송송 뚫린 갯벌 생물들의 숨구멍으로 물이 보글보글 솟아난다. 그리고 맑은 물 위에 하나씩 제 그림자를 만든다. 그러나 이 그림자마저도 몇 시간 후면 넘실대는 바닷물이 채워지며 빗방울이 그려 놓은 파문과 수많은 갯벌 위의 흔적들이 지워지듯 모두 바닷물 아래로 사라지고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은 없다. 어차피 역사든, 소설이라는 에피소드든, 이 벌교 대포리 갯벌은 변함이 없으리라. 소설 속의 그녀들처럼 꼬막을 캐러 뻘배를 밀고 오가며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갯벌에 생존을 의탁한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고, 포용과 정화의 공간이라는 무궁한 갯벌의 기운 또한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 없이 붉은 칠면초는 무리지어 군무를 추고, 물새들의 발자국과 빗방울의 파문을 덤덤히 품고 담아갈 테니 말이다. 바닷물은 이미 뻘을 덮어가고, 먼 길, 긴 시간을 돌아 찾아 왔던 벌교 뻘밭과 헤어질 순간이 왔다.

다시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작별의 무거움을 머금었는지 쉼 없이 갯벌로 낙하한다. 선착장을 벗어나 여전히 인기척이라곤 없이 정적만이 흐르는 마을로 들어섰다. 쏟아져 내리는 눈송이들로 채워지는 벌교 꼬막밭을 보며 까닭 모르게 터져 나온 짧은 한숨으로 아득해지는 갯벌에게 작별을 고했다.

푸두둑! 반들반들 잔뜩 물기를 머금은 뻘밭에서 마지막 노획물을 찾은 갈매기가 하얀 눈을 박차고 힘차게 비상을 했다.



글·사진=양지혜 여행작가 himei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