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 품질, 현대성, 3박자 고루 갖춘 한국관광상품에 대한 제언

슬로푸드 운동가 노민영 씨는 이탈리아 미식 여행을 다녀온 후 "명품 가방 하나 안 사왔냐"는 친구의 말에 대답했다. "난 25년산 발사믹 식초 한 병 사왔어."

한 나라를 두고두고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결국 귀국하는 관광객들의 여행 가방 속에 든 기념품이다. 집으로 돌아와 식초 병을 따는 순간 25년 동안 숙성된 묵직한 향이 피어 오르고, 그것은 음식에 대한 이탈리아의 어마어마한 자부심과 장인 정신을 다른 어떤 메시지보다 더 강력하게 전달할 것이다.

한국 관광기념품은 조선시대에서 완전히 정체 상태다. 이태원, 인사동, 남대문 등지에서 파는 기념품들은 한국의 현대문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조악한 품질,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비실용성으로 관광객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도 중국산이다. 한국의 이미지가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상상력의 부재다. 사실 우리에게는 무제한의 자유가 있다. 한국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외국인들에게는 우리가 말해주는 것이 곧 한국의 이미지가 된다. 그들에게 한복 입은 인형과 태극 부채만 연신 팔아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한국에 대한 그들의 상상을 가로막는 일이다.

국내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상품을 추천받았다. "부실한 한국 현대문화에서는 나올 것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 아직도 부채와 열쇠고리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 창의적이고 실현 가능한 의견들을 추렸다. 조건은 지금의 한국 문화를 반영할 것, 실용적일 것, 여행 가방에 넣을 수 있을 것.

이장우브랜드마케팅그룹 이장우 박사 -

아이폰 케이스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한 번 보면 질리고 말 전통문화만 줄곧 이야기하느니 우리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IT 분야를 강조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태국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처음에만 왕궁을 방문하고 그 다음부터는 가지 않습니다. 전통문화는 사람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어요. 뉴욕이나 파리에서는 계속해서 새롭고 현대적인 볼거리들이 개발되죠. 트렌디하고, 쿨하고, 모던하고, 컨템포러리한 것들이 관광객들을 질리지 않게 합니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케이스에 한국적인 문양을 넣어서 판매하는 것은 어떨까요? 한글을 주제로 작업한 이상봉 디자이너의 패턴도 괜찮을 듯합니다.

거창한 전통문화보다는 가장 팬시한 최신 상품으로 공략하면 많이 사갈 겁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그 자리에서 당장 쓸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무엇보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대단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대단하지 않아요. 몇몇 외국인들의 '원더풀' 소리에 자위하기보다 글로벌한 시각을 갖추었으면 합니다.

한글 액세서리
문화경영연구원 송은하 대표 - 한국 작가의 책

한 사람이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자 하는 결심은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퐁네프 다리에 서 있는 자신, 그리고 그 모습이 낭만적이라고 생각될 때 비로소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게 되는 거죠.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이에요.

각 나라 관광청 대표들의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항상 한국 작품을 번역한 책의 필요성에 대해 듣습니다. 이문열, 신경숙, 황석영 등 한국의 현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글만큼 현재 우리나라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통로가 또 있을까요?

작품에서 거론되는 한국의 특정 지역, 그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감정들은 외국인들의 동경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해요. 소설, 시, 영화 등 다른 예술 콘텐츠들도 마찬가지고요.

지금까지의 기념품은 죽은 문화를 선물하는 것에 그쳤어요. 상상력을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했죠. 살아 움직이는 문화 속에서만 상상이 일어납니다. 사실 앞서 말한 작가들의 책은 이미 영어와 스페인어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와 있어요.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데 필요를 못 느끼니까 내국인들 사이에서조차 정보가 없는 상황이죠. 번역서의 질이 높아지고 양이 많아지고, 가능하면 자원 봉사자들이 많이 생겨나서 이것을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거나 선물로 주는 캠페인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한국관광마케팅 구삼열 대표이사 -

현재 한국 관광산업 중 가장 개선되어야 할 것이 기념품입니다. 중국 관광객들은 해마다 밀려 들어오는데 기껏해야 인사동에서 국적불명의 조잡한 기념품을 사가는 것이 전부죠. 전통문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디자인 서울'을 외치면서 왜 국내의 유능한 젊은 작가들을 관광상품 개발에 활용하지 않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당장 실용화할 수 있는 의견을 하나 내자면 절반 크기로 줄인 장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의외로 종묘 근처에 악기를 사러 가는 외국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은 실용적인 것을 원하지 집에 가져다 놓고 보기만 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의외로 장구의 판매율이 높은데 사이즈 때문에 가방에 넣고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로 만든 도장
반이나 4분의 1 크기로 줄이되 실제로 연주할 수 있는, 아동용 바이올린처럼 작고 귀여운 장구를 팔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퀄리티가 아주 좋아야겠죠.

사실 그냥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훌륭한 관광상품입니다. 항상 걸림돌이 되는 건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드러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입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사가서 "이건 한국에서 사온 거야"라고 설명을 해주기만 하면 그게 그때부터 한국의 현대 감성을 담은 관광상품이 되는 겁니다.

갤러리 뤼미에르 최미리 대표 -

한국 관광상품 개선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퀄리티입니다. 비싸니까 안 살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에요. 그들은 생각보다 가격 저항이 강하지 않아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왜 샹젤리제 거리까지 가서 명품백을 사가지고 오는지 숙고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위 지향을 하게 되어 있고, 그건 여행 중에 더 두드러져요.

하프사이즈 장구
일전에 한국을 방문한 국가 원수들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떠올렸던 것이 도자기에요. 고려 청자를 선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그건 막상 실용성이 떨어지잖아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도입니다.

대통령과 영부인에게 방한 전 미리 사인을 받아놓고 이걸 도장에 새겨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니면 가문의 문장 같은 것도 좋고요. 서구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는 식기에 문장을 새기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걸 한국식으로 바꾸는 거죠. 그들은 손으로 만든 하나뿐인 제품, 핸드 메이드에 그야말로 껌뻑 죽습니다.

자신의 사인이 들어간 도장이라면 더 애착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반만 년 역사도 자연스럽게 전달되고요.

좀 더 대중적인 것으로는 민화나 부적의 문양을 이용한 책갈피도 좋을 것 같아요. 부적에는 우리나라의 정신문화가 담겨 있죠. 개인적으로는 가톨릭이지만 우리의 얼은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이 섞여 있는 한국의 종교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신앙이 한국을 이끈 힘이죠.

사실 정신문화 외에는 서구에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어요. 그들이 뭐가 부럽겠습니까. 오직 예술과 문화로만 주목을 끌 수 있어요. 그들에게 없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해서 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켜 액자나 책갈피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대충 코팅한 질 낮은 책갈피는 절대로 안 되겠죠.

아이폰, 아이패드 케이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 최정화 대표 -

늘 옆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실용성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패션, 주방용품, 인테리어 용품, 사무용품 등을 제안하고 싶어요. 실제로 지금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는 한글을 이용해서 남녀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액세서리로 만들면 좋을 듯해요. 팔찌의 참으로 이용해도 좋고, 스카프, 가방에 프린트하는 것도 괜찮겠죠. 액세서리는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생활용품 중에는 앞치마와 테이블 러너, IT 제품 중에는 휴대전화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전통을 강조한 나머지 사용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에요. 우리가 알리고 싶은 것을 넣되 구매충동을 일으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러려면 문양은 한국적이되 형태나 기능면에서는 모던하고 흥미를 끌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한글의 정신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설명하면 그걸 누가 듣겠어요? 예뻐야 사고 재미 있어야 사죠. '너무 예뻐서 샀더니 이 문양이 한국의 글씨더라' 같은 경우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