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옷 6 아웃도어 열풍중년부터 청소년까지, 일할 때도, 집에서도, 놀러 갈 때도

노스페이스
장면 1

인천 공항 라운지. 팻말을 든 가이드 앞으로 하나둘 중년의 여행객들이 모여든다. 40대 아주머니, 50대 아저씨, 70대 할머니는 모두 티셔츠, 점퍼, 조끼, 신발, 배낭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등산복 차림이다. 모두 모여 히말라야 등반이라도 가는 걸까? 무슨 소릴. 그들의 여행지는 일본이다.

장면 2

이른 겨울 아침, 고등학교 앞으로 난 오르막 길을 시커먼 '고딩'의 물결이 메우고 있다. 시커먼 색깔의 정체는 까만색 패딩 점퍼. 지나가던 외국인이 한 학생을 붙들고 묻는다. "너희 학교에 등산부 있니?"

아웃도어 업계 1위 가 업계 최초로 연 매출 5000억 원을 돌파했다. 매출 5000억 원이면 웬만한 히트 브랜드 5개의 매출을 합친 금액이다.

현재 국내에서 단독 브랜드로 5000억 원 매출을 운운할 수 있는 브랜드는 제일모직의 빈폴 정도. 의 뒤를 잇는 코오롱스포츠 역시 코오롱패션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브랜드답게 4200억 원으로 전년대비 30% 신장, 3위인 K2는 3100억 원으로 40% 신장하며 업계 톱 3가 모두 브랜드 론칭 이후 매출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국패션협회는 올해 패션업계 10대 뉴스를 선정하면서 그 중 하나로 '패션계 최강자, 아웃도어 매출 폭발'을 꼽았다. 말 그대로 폭발이다. 남자도 여자도, 소년도 할아버지도, 좌파도 우파도 모두가 등산복을 입는다.

작금의 아웃도어 열풍은 한국의 패션 현상들 중 가장 최신의 것이자 가장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 없다. 2010년 한국인의 만능 유니폼으로 떠오른 아웃도어에 대하여.

동네 슈퍼 갈 때도 서바이벌 복장?

아웃도어 인기의 첫 번째 원인은 실제로 레저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등산의 유익함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다가 시들해지니 금세 '등산은 관절에 안 좋으니 트레킹하세요'라는 기사가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올레길이니 바우길이 진부해지면 이번에는 자전거가 이슈로 떠오른다.

그러다 자전거가 질리면? 아직 전면에 부각된 적 없는 캠핑과 트레일 러닝, 암벽 등반이 기다리고 있으니 당분간 도시인들의 아웃도어 사랑이 사그라들 염려는 없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인들의 야외 활동이 늘었다는 것만으로는 이 열풍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얼마 전 KBS 오락프로그램 <1박2일>에서는 출연진들이 시골 마을 집들을 방문하며 주민들을 만나는 장면이 방영됐다.

발열 기능이 있는 폴라폴리스 조끼에 흡습속건 바지, 초경량 다운 재킷 등 극한의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아웃도어 룩으로 무장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평온한 표정으로 강호동과 이승기를 맞이했다. 촌로들의 전통적 코스튬인 몸뻬도 등산복 앞에서 맥을 못 췄다.

"아웃도어 룩의 전성 시대는 등산복을 일상복으로 입기 시작했을 때부터예요. 산을 오를 때는 물론이고 간단한 외출, 모임 등등. 지금은 완전히 포멀한 상황 외에는 전부 아웃도어 룩을 입을 정도예요."

'양복을 안 입을 땐 무엇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계속 변해왔다.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골프복, 그리고 지금은 아웃도어로 바뀌었다.

"골프복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산뜻한 디자인도 있지만 기능성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아웃도어의 기능이 그걸 뛰어 넘었죠. 기본적으로 모든 옷에 방수, 방풍, 투습의 기능이 들어 있고 여기에 추가로 발열, 자외선 차단, 냉감, 냄새가 배지 않는 섬유 등 기능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좋아지고 있어요."

처음엔 온전히 산행을 위해 샀던 옷들이, 따뜻하고 편안하고 몸에 착착 감기니 일상 생활에서도 자연히 손이 가게 된 셈이다.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대중의 심리에 착실하게 반응했다.

일상복으로 입어도 어색하지 않도록 패션성을 가미한 것. 빨강, 노랑, 파랑 등 색깔을 화사하게 바꾸고, 체크 무늬를 넣거나 허리 라인을 날씬하게 만들었다. 평소 입던 면바지나 셔츠와 함께 코디할 수 있도록 레깅스, 반바지, 심지어 아웃도어 치마까지 나왔다.

손님을 빼앗긴 캐주얼과 스포츠 브랜드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장 억울한 것은 역시 중장년층의 오프타임을 책임졌던 PAT와 크로커다일레이디스. PAT는 얼마 전 기능성 발열 섬유를 넣은 경량 다운 재킷을 출시했다.

무게는 달랑 270g으로 티셔츠보다 가벼우며 햇볕에 노출되면 스스로 열을 내는 코어브리드 섬유를 사용했다. 코어브리드는 주로 아웃도어 제품에 활용되는 기능성 섬유다. 크로커다일레이디를 보유한 패션그룹형지는 아예 여성 전용 아웃도어를 표방하는 와일드 로즈를 론칭했다.

스포츠 브랜드인 아디다스 역시 내년부터 아웃도어 라인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휠라와 코데즈컴바인도 각각 아웃도어 브랜드 휠라 스포트와 코데즈컴바인 하이커를 선보일 예정이다.

"나쁜 형들한테 패딩을 뺏겼어요"

재미있는 것은 아웃도어 열풍이 청소년들의 패션 세계와 시기상 맞물렸다는 점이다. 어느 세대보다 브랜드 추종이 강한 나이 대답게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늘 우상으로 떠오르는 브랜드가 하나씩 있는데, 이스트팩, 게스, 인터크루, 아디다스 등이 차례로 수혜를 입은 바 있다.

이는 본사의 마케팅의 힘이라기보다는 도저히 그 규칙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패션 법칙을 따라 선정되는 것으로, 하필 최근 간택된 것이 다.

웹 상에서는 일진 패션으로, NY가 겹쳐 새겨진 까만 야구모자, 패딩, 험멜 트레이닝 바지, 여기에 컨버스 신발이 소개됐다. 모자나, 바지, 신발에는 그나마 다른 선택지가 있지만(카파나 나이키 등) 패딩은 그들만의 엄격한 법칙에 따라 다른 브랜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덕분에 이 브랜드의 까만 패딩과 바람막이 재킷은 '중고딩'들의 교복이 돼버렸다. '진짜 일진은 노페 아니면 안 입는대'라고 외치는 그들의 귀여운 집착은 분명 매출 5000억 달성의 주요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아웃도어 신드롬은 이제 마지막 남은 20~30대를 향하고 있다. 아무리 아웃도어 의류가 편해도 패션에 민감한 젊은 이들까지 산 외에 다른 장소에서 등산복을 입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산복이 아닌 등산복 스타일의 패션이 등장하며 이마저 흔들리고 있다. 캐릭터 정장 브랜드 본은 최근 본지 플로어라는 이름의 세컨드 브랜드를 론칭했다.

"기능성은 빼고 스타일만 차용했습니다. 아웃도어 룩의 자연친화적이고 액티브한 느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나와 있는 캐릭터 정장들은 대부분 도시적이고 모던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차별화 전략도 될 수 있고요."

남성복을 넘어 하이패션도 아웃도어를 넘보고 있다. 디자이너 한상혁은 올해 상반기 서울패션위크에서 아웃도어에서 영감을 얻은 '마운티니어링'이라는 테마로 컬렉션을 선보였다. 굵은 로프, 금속 클립, 모직 백팩 등이 클래식한 수트에 신선함을 부여하는 액세서리로 활용됐다.

"2050년에는 전세계 인구의 50%가 도심으로 집결된다는 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갈수록 변화무쌍해지는 기후 때문에 사람들은 도심 속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비즈니스 웨어와 아웃도어가 결합될 것입니다."

인터패션플래닝 박세은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아웃도어의 기능성은 얌전한 도시인들에게는 다소 과한 측면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정말로 그 기능들이 필요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공통이다.

먼 미래에는 출근할 때 막강한 신축성을 가진 초경량 수트를 입고 등에는 배낭을, 어깨에는 로프를 매고 집을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