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의 옷 (7) 청담동 며느리룩부러움과 죄책감, 명품을 소비하는 한국인의 애증의 법칙

에르메스 버킨백
"에르메스는 안 된다고?"

최근 '청담동 며느리 룩'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상류층 집안의 며느리를 의미하는 청담동 며느리들의 패션에 대해 경제지를 위시한 각종 매체에서 다루고 있으며, 케이블 TV의 패션 프로그램에서는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로 코디하는 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치와 부가 허용되는 그녀들에게도 금지된 것이 있다고 하니 바로 에르메스 버킨 백이다. 보통 400만~500만 원대의 명품 가방에 비해 최소 1300만 원에서 높게는 1억 원을 호가하는 버킨 백은, 철저한 서열의 세계인 재벌가에서 오직 시어머니에게만 허용된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청담동 며느리, 그들만의 법칙

"반 농담조로 나온 말이죠. 하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에르메스 버킨 백은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제품이잖아요. 구매 이력이 엄청나게 쌓이거나 에르메스 쪽에 지인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시어머니에게도 없는 걸 며느리가 가지고 있으면 사치벽이 있는 걸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죠. 청담동 며느리의 조건은 아무래도 나대지 않고 조신한 이미지인데, 시어머니보다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건 위 사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요."

샤넬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A씨의 말에 따르면 청담동 며느리의 미덕은 부유함과 순종의 미묘한 조화에 있다. 이들의 스타일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거의 10년 전부터다.

트위드 재킷, 굵직굵직한 주얼리, 페라가모 구두, 에트로 머리띠로 대표되는 부티 나고 참한 옷 차림은 TV 드라마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이는 당연히 그들의 '상전'인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된 것으로, 일명 청담동 사모님으로 불리는 그들은 성북동, 한남동, 청담동 등지에 거주하며 미술품을 사들이고 밤에는 최고급 재생 크림을 바르며, VVIP로서 쇼핑을 즐기는 한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패션은 며느리들에게 추천(또는 강요)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청담동 며느리 룩이 다시 한 번 회자된 적이 있는데 드라마 <나는 전설이다>에 출연한 탤런트 김정은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수트, 1억 3000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 콜롬보의 보석 박힌 클러치, 최대한 노출을 절제한 얌전한 차림으로 명문가 며느리 역할을 소화했다. 그러나 현실은 약간 다르다.

루이비통
드라마이다보니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기도 하거니와, 전형적인 청담동 며느리 룩은 이미 수많은 '워너비'들에 의해 복제돼 정작 당사자들은 차별화를 위해 다음 단계로 넘어 갔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명품을 선호해요. 이나 프라다, 같은 브랜드는 이미 몇 개씩 가지고 있고 대중적으로도 너무 흔해졌으니까 이런 브랜드로 도배하는 건 한 물 간 셈이죠. 게다가 대부분 외국 생활 한 번씩 안 해 본 사람들이 없고 언제라도 해외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 쇼핑하기보다는 외국에 나가 비싸면서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사가지고 와요. 그리고 해외에서 사는 게 국내보다 싼 경우가 많잖아요. 그들은 의외로 가격을 무시하지 않아요. 물론 VVIP 카드를 유지하기 위해 가방 하나를 추가로 사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요."

옷 브랜드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편이지만 가방만은 과 에르메스가 대세다. 부족할 것 없는 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욕구는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이 아예 모르는 브랜드는 선호하지 않는다.

지난해 지방 선거 때 심은하 씨가 남편 지상욱 씨와 동행하며 보여준 패션이 요즘의 청담동 며느리 룩과 가장 근접하다. 그녀는 묽은 블루 컬러의 에르메스 버킨 백을 들고 피아자셈피오네의 아이보리 색 코트에 의 투톤 펌프스를 신었다. 피아자셈피오네는 이탈리아 브랜드로 국내에 정식 수입된 지는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명품은 유죄?

상류층에서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면 명품 브랜드를 보는 시야는 급격히 좁아진다. 제대로 대접받는 브랜드는 , , 에르메스, 딱 세 개뿐으로, 그 위상은 최근 활개치고 있는 중고 명품 시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위 세 브랜드는 제 값을 받고 되팔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델명에 따라 프리미엄이 붙는 경우도 있는 반면, 그 밖의 다른 브랜드는 제 아무리 지난 컬렉션을 해외 언론의 극찬 속에서 치른 핫 브랜드라고 해도 대번에 가격이 반 토막 나고 만다.

명품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한국에서만 보여지는 또 하나의 주요한 특징은 죄책감이다. 일본이 '이지메' 당할까 봐 두려워하며 허겁지겁 명품 가방을 산다면(20대 도쿄 여성의 95%가 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중국은 가문의 체통을 지키고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명품을 소비한다.

중국에서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과 에르메스의 스펠링도 모른 채 매장 안의 물건을 쓸어오다시피 하는 부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시아 국가들의 명품 소비 행태를 분석한 <럭스플로전>에서는 중국의 한 신흥부유층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에르메스 매장에 들렀다가 마침 매장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곳곳에 장식해 놓은 도자기를 모조리 현금을 주고 싹쓸이해왔다.

에르메스가 가죽 가방으로 유명한 브랜드라는 것을 몰라서 생긴 에피소드다. 책의 저자는 '명품은 유죄'라는 관념은 한국 사회에서만 보여지는 흥미로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유교 문화를 공유하는 중국과 홍콩이 그들의 문화를 명품 소비와 별개로 여기는 데 반해 한국은 철저히 연결 짓고 있다. 가족의 체면도 중요하지만 검소함과 절제가 그보다 위에 있다…한국만의 자본주의도 한 몫 한다. 타 국가의 자본주의가 개인이 성취하는 부에 박수 치는 반면 한국에서 부는 개인이 아닌 국가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단일 민족의 애국심도 끼어든다. 과소비도 나쁘지만 수입품 소비야말로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이는 기성 세대뿐 아니라 젊은 세대로 넘어와서도 좀처럼 사그러 들지 않는다.

그들이 만들어낸 '된장녀', '신상녀'라는 단어에는 명품에 목 매는 이들에 대한 멸시가 가득하다. 상류층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상류층에게 있어서 명품 소비는 그들의 소득 수준에 비해 결코 과소비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다 보니 대중의 원망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부를 누리되 서민의 열패감을 건드리지 않도록 은밀하게 소비하고 은근하게 과시하는 것은 이 나라의 부자와 연예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행동 양식이다.

근검절약의 가치관이 무색하게도 한국은 모든 럭셔리 브랜드가 주목하는 명품 소비국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명품의 40%를 싹쓸이하는 일본, 지난해 27%를 소비하며 미국을 제치고 2위로 뛰어오른 중국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이지만 덩치에 비해 만만치 않은 소비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 컨설팅 회사 매킨지에 따르면 최근 1년간 한국의 명품 소비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돈, 미모, 학벌, 집안 등 뭐든지 경쟁의 소재가 되는 한국에서, 손쉽게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명품이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한 세기 만에 180도로 바뀐 에 대한 평가다. 부를 과시하는 패션을 멸시해 화려함 대신 단순함을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확립한 코코 이, 100년 후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자신의 옷이 부의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