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룸 콘티랙
어떤 가구를 어떻게 놓느냐가 일상을 좌우한다. 난생 처음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책상을 갖게 된 소녀는 숙제도 더 빨리 하고, 일기도 더 자주 쓰게 될 것이다. 식탁과 침대 사이 책장을 치우면 원룸에서도 매트 깔고 요가를 할 수 있다.

이층 침대는 잠잘 때마다 보이 스카우트 시절의 모험심을 다시 일깨우며, 옷을 갈아 입힐 수 있는 쇼파는 돌보는 마음을 갖게 한다. 가구에는 생각한 대로 살게 해주기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힘이 있다.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시장이 술렁이는 것은 이케아가 단지 싸고 예쁜 가구를 팔아서만이 아니다. 이케아는 가구와 사용자, 공간 간 관계를 다시 제시했다.

<이케아-스웨덴 가구왕국의 상상초월 성공 스토리>의 저자 뤼디거 융블루트가 지적하듯 사용자에게 운반과 조립을 떠넘긴 이케아의 전략은 "컨베이어벨트를 거실까지 연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사용자가 가구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조금 불편하고, 완성한 의자 다리가 조금 비뚤어도 사용자들은 자신의 작품에 너그러웠다. 조립식 가구가 거대하고 현기증 나는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잃어버린 자존감과 성취감을 회복시켜줬던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소박하고 기능적이며 약간 동화적인 스타일은 사용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목구비가 정돈된 미인처럼 보였고, 어떤 세팅 속에도 이물감 없이 스며드는 이케아 가구는 공간을 '연출'하는 사용자의 환상에 더없이 어울렸다.

수입대행 업체를 통해 이케아 가구를 한두 개씩 사모으던 한국 소비자들이 기꺼이 비싼 가격을 지불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으론 주거 공간이 아파트로 획일화되어 있고, 한편으론 젊은 층이 독립된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에 어려운 사회적 상황이 이케아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열망을 더욱 불지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케아만이 유일한 답일까? 국내에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가구가 없을까? 세계인의 취향을 통일해 나가고, 지역을 생산과 소비의 장으로 접근하는 다국적 기업의 생리가 불편한 사용자에게는 어떤 옵션이 있을까? 가격과 디자인, 조립과 공간 구성력 등 우리가 이케아에 거는 기대를 만족시키고, 때로는 넘어서는 국내 가구 브랜드를 찾아 봤다.

사용자의 주도권을 회복시키는 공간 박스와 모듈

공간 박스를 기본으로 조합과 배치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의 책장과 책상, 수납장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제품은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고, 이사가 잦은 사용자에게 매우 유용하다. 장난감 블록처럼 끼워 맞추는 방식이라 드라이버 등 공구가 필요 없고, 사용하다 모양을 바꾸거나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www.cubics.co.kr

펀잇쳐스
일룸이 선보인 DIY 제품인 콘티랙은 'ㅍ','ㅠ' 자 형태의 기본 모듈을 어떻게 얼마나 조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실루엣과 크기의 선반장으로 변신한다. 컬러와 형태가 점잖은 편이라 캐주얼한 DIY 가구가 꺼려지는 사용자들이 선택할 만하다.

소품을 만든다기보다 작은 건축물을 짓는다는 느낌이 더 강한 제품. 그만큼 견고해 보이지만 조립이 아주 쉽지는 않다. 전동 드라이버 사용을 권한다. www.iloom.com

합리적 가격에 안정된 디자인,

'하다'라는 뜻의 'do'와 인터넷 주소에 쓰이는 점을 의미하는 'dot'을 합친 브랜드 이름이 명쾌하다. ''은 온라인에서 주문해 직접 조립하는 가구다. 2005년 말 생긴 이후 저렴한 가격과 단정한 디자인으로 입소문이 났다.

초기에는 디자인 회사들이 주 고객이었다. 디자인 회사들이 가구를 주문 제작하는 대신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모스, 콰트로 등 테이블류가 안목 높은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다. 견고하고 차분한 디자인의 이들 제품은 많은 카피 제품을 낳았으며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군림 중이다.

두닷
최근엔 수납장과 침대, 주방가구 등 가정용 가구의 구색을 넓혀가고 있다. 20~30대 싱글족과 신혼부부에게 인기가 높다. 대부분의 제품이 십자 드라이버 하나로 조립할 수 있으며, 좁은 공간에서 활용하기에 편리하다. 아랫쪽에만 문을 달 수 있는 책장, 사이드 테이블을 얹어 면적을 늘릴 수 있는 홈바 등의 아이템은 아이디어가 좋다.

다른 어떤 가구와도 매치할 수 있고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베이직한 색과 형태도 가구의 장점. 화이트 아이보리 색을 메인으로 레드, 블랙 등의 단색, 나무 무늬 등을 선보인다.

안정적인 물류, 배송 시스템은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는 다른 소규모 가구 브랜드에 비교했을 때 최대의 강점이다. 자체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수도권 지역은 직배송한다. 2~3년 내에 지방 물류, 배송 시스템까지 갖출 예정.

웹 이미지만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소비자를 위해서는 2009년 방배동에 쇼룸을 열었다. 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의 베스트셀러 제품을 전시했다. 단, 직접 구입은 할 수 없다. 유통 비용을 증가시키지 않기 위해 말 그대로 쇼룸으로만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한국의 이케아'에 가장 가까운 브랜드이기에 이 이케아 한국 진출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관심거리다. 성경규 마케팅팀장은 "지금까지는 국내 시장에서 밑작업을 한 셈이다.

두닷(사진 임재범 기자 )
인지도가 높아지고 규모도 커진 만큼 앞으로 가격과 품목을 다양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저가지만 한 번 쓰고 버리는 제품이 아닌, 관련 제품을 연달아 구입하게 만드는 제품을 선보인다는 자부심도 의 자산이다. www.dodot.co.kr

안분지족의 지원군,

"사용자가 진정한 공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조용히 지원하는 가구."

이런 기특한 가구가 있다. 이름은 'Fun-it-Urs', 직역하면 '너의 것을 즐겨라'다. 사용자의 능동성을 부추기는 디자인이라는 점에서는 이케아와 상통하고,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한 수 위다.

대표 제품인 F1드림시리즈는 트랜스포머 같은 가구다. 책상은 선반과 서랍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형되고, 침대와 겹쳐 차지하는 면적을 줄일 수도 있다. 침대 헤드는 젖히면 선반이 된다. 침대를 소파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등받이 쿠션도 출시될 예정이다.

큐빅스
의 공간 구성력이 예사롭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샘의 외주 디자이너로서 여러 차례 굿 디자인으로 선정된 어린이 가구들을 선보인 오서연 디자이너가 차린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구는 어린이의 성장 과정에 맞춰 재조합, 변형될 수 있는 기능으로 인기를 끌었다.

가구의 미니멀한 색과 형태에는 디자이너의 철학이 녹아 있다. 이미 규정된 가구보다는 사용자에게 여지를 남겨주는 가구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가구들은 예쁘고 재치 있지만, 나서거나 들떠 있지 않다. 명랑하지만 안정감 있는 분위기를 보장한다.

친환경을 지향한다는 점도 의 매력이다. 재활용될 수 없는 소재를 최소화하고 철제 프레임을 이용한다. 다양한 활용 가능성도 친환경성과 맞닿는다. 사용자가 제품을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특성은 '안분지족'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사용자에게 알맞는 공간과 분위기, 생활을 도모하며 가격 또한 합리적이다. 어떤 가구는 이렇게 삶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참, 2월에는 아티스트 기미노와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이 출시된다. www.furniturs.com


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오서연 디자이너 인터뷰
"상당한 기간 동안 브랜드가 요구하는 오브제적 가구를 디자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공간의 주인인 사용자를 조용히 지원해주는 가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의 디자인은 일정 부분 반(反)디자인의 성격을 띱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규정하기보다 사용자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려고 합니다. 타자와 소통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지속 가능한 디자인 방법론입니다."

친환경성에 집중한 이유는요?

"친환경은 가구가, 또 지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가구들이 너무 쉽게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활용 가능성이 내재된 가구를 만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의 타깃은 누구입니까?

"공간이 넓더라도 방만하게 쓰지 않고 좁은 공간도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사용자입니다."

이 가구들을 사용하면 공간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 같은데요, 이런 철학을 공유하는 다른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있습니까?

"이케아, 무인양품 등이 사용자 관점의 모듈에 대한 모색으로 성공적인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구 브랜드는 아니지만, 애플도 같은 맥락의 성공 사례인 것 같습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